핵·중국·러시아… 체제보장 ‘삼체’ 완성한 북한
한국전쟁 발발 74주년을 맞은 2024년 6월25일 남쪽 대구와 북쪽 평양에서 각각 대규모 행사가 열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양국 관계를 ‘준동맹’ 수준으로 격상시킨 뒤 달라진 한반도 정세에 대한 남과 북의 인식 격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자리였다.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끝난 뒤에도 한반도는 ‘냉전의 외로운 섬’으로 남았다. 북-러가 6월19일 체결한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북-러 조약)은 세계적 차원에서 탈냉전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웅변한다. ‘탈냉전의 종언’은 냉전이 끝난 적 없는 한반도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남과 북의 정세 인식 격차
윤석열 대통령은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6·25전쟁 74주년 행사’에서 “북한의 도발에 압도적으로,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라며 “우리가 더 강해지고 하나로 똘똘 뭉치면 자유와 번영의 통일 대한민국도 결코 먼 미래만은 아닐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북-러 조약에 대해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군사·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역사의 진보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 행동이 아닐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윤 대통령은 부산 해군작전기지를 방문해, 한·미·일 3국의 첫 다영역 군사훈련인 ‘프리덤 에지’에 참가하기 위해 입항한 미국 핵추진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스벨트함에 올랐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우리의 동맹은 그 어떠한 적도 물리쳐 승리할 수 있다. 한·미·일 3국의 협력은 한-미 동맹과 함께 또 하나의 강력한 억제 수단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힘에 의한 평화’라는 윤 대통령의 ‘소신’을 새삼 강조한 게다.
같은 날 북쪽에선 평양 5월1일경기장에서 10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6·25 미제 반대투쟁의 날’ 평양시 군중집회가 열렸다. <노동신문>은 “가장 정의로운 사명을 지닌 우리의 힘, 최강의 전쟁 억제력을 백배, 천배로 억세게 다지며 전민 항전 준비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가장 정의로운 사명을 지닌 우리의 힘’은 핵무기를 가리킨다.
이어 신문은 “인민경제발전 12개 중요 고지 점령이 원수들에게 안기는 무서운 철추(쇠몽둥이)”라며 “일터마다에서 혁신과 증산의 동음을 세차게 울리며 더 큰 애국의 성과들을 줄기차게 달성함으로써 조국의 존엄과 위상을 높이 떨치고 반제반미 대결전에서 언제나 승리만을 쟁취해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인민경제발전 12개 중요 고지’는 2022년 12월 말 열린 조선노동당 제8기 중앙위원회 6차 전원회의(8기6차 전원회의)에서 “전반적 경제발전과 인민생활에 직접적이고 관건적인 영향을 주는” 부문으로 규정한 알곡·전력·석탄·질소비료·시멘트·살림집 등을 일컫는다. ‘경제발전이 곧 복수’란 주장인 셈이다.
북-러 조약 체결 이후 윤석열 정부는 ‘강공 드라이브’에 나설 기세다. 주러시아 대사를 지낸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이 북-러 조약에 대해 ‘궤변’ ‘어불성설’ 등 비외교적 용어까지 동원해 맹비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6월20일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문제를 재검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비살상용 군수물자만 지원하던 기존 방침을 깨고 우크라이나에 살상용 무기를 제공할 수도 있음을 내비친 거다. 6월21일엔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를 외교부로 불러 항의(초치)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맞서 지노비예프 대사는 “러시아에 대한 위협과 협박 시도는 용납될 수 없다”고 반발했다. ‘수교 이후 최악’이라던 한-러 관계가 더욱 나락으로 빨려들 기세다.
‘자동 개입’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북쪽 분위기는 사뭇 달라 보인다. 핵무장 강화란 기존 노선을 유지하면서도 경제발전 쪽으로 본격적으로 내달릴 모양새다. 북-러 조약에도 이런 북쪽 의중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실제 전문과 23개 조로 이뤄진 북-러 조약은 군사·안보를 다룬 조항이 6개(제3~8조)인 반면 경제를 비롯한 각 분야 협력 방안을 담은 조항은 12개(제9~20조)나 된다. 상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북-러 조약 체결 직후 세간의 관심은 제3조와 제4조로 쏠렸다. 조약 제3조는 “쌍방 중 어느 일방에 대한 무력침략행위가 감행될 수 있는 직접적인 위협이 조성”되면 “쌍무협상 통로를 지체 없이 가동시킨다”고 규정한다. 또 제4조는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 지체 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돼 있다. 다만 제4조에는 집단적 자위권을 규정한 유엔헌장 제51조와 양국 법에 따른다는 두 가지 전제가 붙었다. 이 때문에 전시에 이른바 ‘자동 개입’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작 중요한 건 ‘자동 개입’ 여부가 아니라, 북-러 관계가 냉전 시절인 1961년 체결한 조약 체제로 복귀했다는 점이다. 국방부 기획조정실장을 지낸 김정섭 세종연구소 부소장은 이렇게 짚었다.
“유사시 상호 원조 의무가 조약에 담겼다. 기본적으로 ‘동맹’으로 볼 수 있다. 한-미·미-일 동맹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못지않다. 조약 내용에 큰 차이도 없다. 일부에선 북-러 조약 체결 뒤 집단방위 원칙을 담은 나토 창설 조약 제5조만 강조하던데, 제11조엔 각 회원국의 ‘헌법 절차에 따른다’는 규정이 있다. 북-러 조약과 일치한다. (…) 북-러 조약 체결에 맞서 정부가 우크라이나 무기 공급 카드를 꺼내 들면서 상황 악화 구도가 만들어졌다. 북-러가 선을 넘었다고 판단하고 대응에 나선 셈인데, 이런 상황에서 ‘기싸움’을 벌이는 것은 현명한 정책이 될 수 없다.”
한국과 소련은 1990년 9월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했다. 한-소 수교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1991년 9월)과 한-중 수교(1992년 8월)의 마중물 구실을 했다. 남쪽은 소련·중국과 수교했지만, 북쪽은 미국·일본과 수교하지 못했다. 이 무렵 북이 핵무기 개발에 나선 이유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1961년 7월 체결된 북한과 소련 간 ‘우호, 협조 및 상호 원조에 관한 조약’ 제1조는 전시에 ‘지체 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온갖 수단으로써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규정했다. 조약을 통해 소련이 북쪽에 ‘핵우산’을 제공한 셈이었다. 한-소 수교로 소련의 핵우산이 유명무실해지면서 북은 자체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 이어 2000년 2월 체결된 ‘조-러 친선·선린 및 협조에 관한 조약’에 따라 양국은 정치·군사 동맹관계에서 벗어났다. 이번에 체결된 북-러 조약에선 다시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로 했다. 양국 관계가 1961년 조약 체제로 복귀했음을 뜻한다.”
‘과잉 반응’ 경계하는 러시아
러시아 쪽은 ‘과잉 반응’을 경계하며, 북-러 조약이 한국이나 제3국을 겨냥한 게 아니란 점을 강조한다.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교부 차관은 6월25일 <스푸트니크> 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북-러 조약을 두고 “한반도와 역내 전체 문제를 군사적 수단으로 해결하기를 바라거나 그럴 계획이 있는 국가들에 보내는 일종의 경고”라며 “이미 어려운 동북아 지역 상황을 악화하려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앞서 푸틴 대통령도 6월20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북-러) 조약은 새로운 게 아니다. 모든 조항이 1961년 조약과 같다. 현 상황에 비춰 반향이 있겠지만, 이전 조약에서 거의 바뀐 게 없다. 북한은 다른 나라들과도 비슷한 조약을 맺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이미 자체 핵무장을 갖췄다. 중국과 체결한 ‘조-중 우호, 협조 및 상호 원조에 관한 조약’(1961년)에 더해, 북-러 조약 체결로 중·러 양국의 ‘유사시 즉각 지원’ 보장까지 받아냈다. 핵·중국·러시아란 ‘체제보장의 3중 구조’를 완성한 셈이다. 북한은 2018년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일주일 앞두고 소집한 당 7기3차 전원회의에서 ‘핵-경제 병진노선’을 폐기하고, “전체 인민들에게 남부럽지 않은 유족하고 문명한 생활을 마련해주는 것”을 수정된 국가 전략 목표로 내건 바 있다. 남쪽을 통해 미국과 만나 체제안전 보장과 정상국가화를 도모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다시 강성 기조로 돌아선 북한은 ‘미국을 통한 정상국가화’ 전략을 폐기했다. 대안은 러시아였다. 북한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줄곧 미국이 주도한 국제사회의 제재 아래 있었고, 2006년 1차 핵실험 이후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차원의 그물망식 제재까지 보태졌다. 2014년 2월 크림반도 합병 이후 주요 8개국(G8)에서 축출된 러시아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미국 주도의 국제사회 제재를 받게 됐다. 이혜정 중앙대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북한에 엄청난 기회의 창이 열렸다. 총체적 고립과 경제제재, 군사적 압박에 공통으로 직면한 북-러 양국은 그야말로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가 됐다. 미국이 만들어준 환상의 조합”이라고 꼬집었다.
블라디보스토크-나선 열차 운행 등 경제협력
1961년 조약과 달리 이번 북-러 조약엔 양국 간 협력을 전방위적으로 확대하는 내용이 대거 담겼다. 에너지·정보통신 등 ‘전략 분야’ 협력 강화(제9조)와 무역경제·투자·과학기술 협조 확대발전(제10조), 상호 지역 간 경제 및 투자 잠재력 이해 촉진(제11조), 농업·교육·보건·체육·문화·관광·환경보호·재해방지 관련 교류·협조 강화(제12조) 등이 구체적으로 적시됐다. 북-러는 조약 체결과 함께 양국 장관급이 나서 ‘두만강 국경 자동차 다리 건설에 관한 협정’과 ‘보건·의학교육 및 과학 분야에서의 협조에 관한 협정’도 맺었다. 특히 “치외법권적인 성격을 띠는 조치를 비롯해 일방적인 강제조치들의 적용을 반대”(제16조)한다고 못박아, 이미 유명무실해진 안보리 차원의 제재에 구애받지 않을 것을 분명히 했다.
“일부 대북 제재는, 부드럽게 말해 ‘이상’하다. 아시다시피 내가 태어난 레닌그라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봉쇄로 고통을 당했다. 수많은 사람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다. 내 형도 그때 죽었다. 지금 북한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나. 북한 정권에 대한 평가는 자유지만, 노동자 국외 송출을 제한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어딘가에서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릴 기회를 가로막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게 인도적인 처사인가.”
6월20일 하노이에서 연 북한·베트남 순방 마무리 기자회견에서 푸틴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안보리 제재에 따라 금지된 북한 노동자의 국외 송출 길을 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앞서 올레그 코제먀코 러시아 연해주 주지사는 2023년 12월 북한을 방문해 김덕훈 북한 내각총리와 양국 간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한 바 있다.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 등은 6월25일 연해주에서 열린 북한의 첫 상품 축제 개막식에 참석한 코제먀코 주지사가 “블라디보스토크와 나선시 간 직행열차 운행을 7월에 재개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중국 쪽은 어떨까? 중국 외교부는 북-러 조약 체결에 대해 “두 주권국가 간의 협력 사안일 뿐”이라며 논평 자체를 피했다. 하지만 일부에선 벌써 “북-중-러 3국 간 두만강 하구 합동 개발과 관광 휴양지 개발 사업 등에서 중국이 핵심 자본조달국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얘기가 나오고 있다. 중국은 두만강 하구 북-러 접경지역을 통해 동해로 진출하는 걸 숙원으로 여겨왔다. 2024년 5월 푸틴과 시진핑의 중-러 정상회담에서도 이와 관련해 북쪽과 협의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통일부 장관을 지낸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두만강 개발 계획 등 오랫동안 논의했던 3국 협력사업을 중심으로, 국경지대에서 북·중·러의 비교우위를 활용한 새로운 삼각 협력을 모색할 수도 있다. 남방(한·미·일)과 북방의 진영 대결이 강화되면, 북·중·러 간 ‘제한된 형태의 북방경제권’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북방한계선 따라 대전차 방호벽 건설 중
한-미 동맹은 ‘이중 억제’에 기반한다. 북한의 남침만 막는 게 아니라 남한의 북침도 막는다. 최근 유엔군사령부가 대북확성기 방송 조사에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합동참모본부의 발표 내용을 종합하면, 북한군은 2024년 4월부터 군사분계선 2㎞ 이북 북방한계선을 따라 4곳에서 대전차 방호벽을 건설하고 있다. 남쪽의 북상도, 북쪽의 남하도 막을 수 있다. 남쪽과 미국을 버린 북한은 중·러를 통한 ‘제한적 정상국가화’로 향해 가는가? 대전차 방호벽이 콘크리트판 ‘적대적 두 국가’ 선언으로 보인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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