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으로 채운 소리와 울림, 수평선 너머 어부를 그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을 판소리로 재해석한 이자람 작창(作唱)극 ‘노인과 바다’가 제주, 경남 김해, 경기 화성을 거쳐 안양 평촌아트홀을 끝으로 상반기 공연을 마무리했다. 쿠바의 어부 산티아고의 삶을 연기한 소리꾼 이자람과 고수 이준형의 능수능란한 장단이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느끼게 하는 무대였다.
소리꾼 이자람의 판소리 작창극 ‘노인과 바다’가 지난 1일 안양 평촌아트홀 무대에 올랐다.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로 시작하는 동요 ‘내 이름 예솔아’로 5세에 방송 활동을 시작한 이자람은 1990년 국악과 인연을 맺어 국립국악중·고교, 서울대 국악과를 거쳐 판소리 인간문화재 오정숙, 송순섭, 성우향 명창을 사사했다.
1997년 ‘심청가’를, 1999년 20세의 나이로 최연소 ‘춘향가’ 완창 기록을 세운 이자람은 2007년 ‘수궁가’, 2010년 ‘적벽가’, 2015년 ‘흥보가’까지 주요 판소리 다섯 작품을 모두 완창했다.
한편 이자람은 2008년부터 작창극을 통해 대중을 만났다.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사천의 선인’을 기반으로 한 ‘사천가’, 2011년에는 ‘억척어멈과 자식들’을 모티브로 한 ‘억척가’의 대본, 음악, 연기를 맡으며 젊은 관객을 국악의 세계로 이끄는 성과를 거뒀다.
2019년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 신작으로 초연한 판소리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소설을 판소리로 재탄생시킨 작품으로 ‘추물/살인’으로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수상한 박지혜가 연출하고 무대미술가 여신동이 시노그래퍼로 참여했다.
쿠바 어촌에 얹는 판소리 가락
특별한 무대장치 없이 텅 빈 공간에 등장한 소리꾼 이자람과 고수 이준형은 암전도 되지 않은 환한 객석을 향해 인사를 대신한 소리 한 자락으로 무대를 열었다.
“볼 것도, 할 것도, 갈 곳도 많은 세상에 우리의 공연을 찾아줘 고맙다”며 한순간 판소리의 벽을 허문다. 판소리가 낯선 관객을 위해 틈틈이 해설과 설명을 덧붙이며 추임새를 독려하고 장단을 가르치는 모습은 렉처 콘서트를 연상케 했다.
평생을 바다 위에서 외줄낚시를 하며 살아온 주인공 산티아고는 커다란 고기를 낚는 재주가 있어 타고난 어부 소리를 들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좀처럼 큰 고기가 찾아오지 않아 대물에 대한 염원을 품고 바다에서 버틴다.
80여일이 지난 어느 날 마침내 청새치 한 마리가 나타나고 바다 깊은 곳에서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청새치와 수면 위의 산티아고는 꼬박 이틀을 대치한다.
이날 무대를 채운 것은 이자람의 소리와 북소리, 거기에 ‘부채’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전통 판소리 무대에서도 부채는 소리꾼 신체의 일부분으로 여겨지며 정체성을 드러내는 요소로 쓰인다. 이자람은 거기에 더해 넘실대는 파도, 팽팽한 낚싯줄, 청새치의 숨통을 끊는 작살 등 그림을 그리듯 부채에 생명을 불어넣어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그렇게 사투 끝에 마침내 청새치 등에 작살을 꽂은 산티아고는 마을로 돌아가 잔치를 벌이고, 연인을 만날 생각에 부풀어 있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하고 상어 떼의 습격에 청새치 몸통을 다 뜯기고 뼈와 머리만 갖고 돌아간다.
손이 끊어지는 고통을 이겨내며 지켜낸 청새치가 눈 깜짝할 새 사라져 버리자 산티아고는 밀려 드는 후회를 되뇐다. 좀 더 큰 배를 가져올 걸, 작살을 넉넉히 준비했더라면, 혼자가 아닌 누구와 함께했으면 상어를 물리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이내 육지에 도착하고 며칠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난 산티아고는 다시 바다에 나갈 채비를 한다.
이자람은 노인이 만난 청새치가 특별한 하루가 아닌 일상으로 여겨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극을 마무리했다. 죽을 고비를 넘긴 하루도,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허탕치는 하루도 모두 일상 속 하루일 뿐, 특별한 것도 대단할 것 없는 하루는 매일매일 그렇게 계속 됨을 노래했다.
소리꾼 이자람은 여는 소리에 이어 닫는 소리로 무대를 마쳤다.
“여러분 엉덩이도 아플 테고, 이자람 몸도 부서질 것 같고.” 웃음으로 마무리했지만 2시간여 바닥에 앉아 있던 고수는 일어나기도, 걷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런 그를 부축하며 퇴장하는 모습을 보며 관객은 더 큰 박수를 보냈다.
이자람은 ‘노인과 바다’ 상반기 일정이 끝나자마자 지난 13, 15일 양일에 걸쳐 ‘적벽가’ 완창을 또 한 번 해냈다. 전통과 작창 사이에서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는 이자람의 다음 무대가 기다려진다.
조혜정 기자 hjch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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