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비행기 납치, 실화 기반 상업영화의 모범 '하이재킹'
[박꽃의 영화뜰]
[미디어오늘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 주의 : 영화 '하이재킹'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준비, 땅! 공항 문이 열리자마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경쟁적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한다. 목적지는 다름 아닌 비행기! 좌석에 번호를 매기는 체계조차 자리 잡지 못했을 만큼 '하늘을 나는 기계'가 생소하던 1971년, 좋은 자리는 오직 달리기 빠른 승객의 몫이었다. 신문물을 처음 접해 눈이 휘둥그레진 승객들은 신발을 벗어들고 올라타고, 심지어는 기내에서 담배까지 풀풀 태운다. 50여 년 전, 속초에서 김포로 가는 국내선 하늘길에 오른 우리 국민들 실화를 다룬 김성한 감독의 '하이재킹' 이야기다.
복고 감성을 물씬 풍기며 등장한 승객들은 금세 '사건'의 한복판에 놓인다. 제목 '하이재킹'(hijacking)이 의미하는 그대로 괴한이 비행기를 납치하기 때문이다. 남루한 차림과 시커먼 얼굴, 광기 어린 눈빛마저 일렁이는 범인은 20대 남자 용대(여진구)다. 사연을 채 드러내기도 전이지만, 짙은 강원도 말씨에 동굴 같은 저음으로 대사를 내뱉는 그는 관객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존재감을 발휘하는 데 성공한다. 비행기 납치를 막지 못해 군에서 전역한 전력이 있는 부기장 태인(하정우)과의 대결 구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본격적인 긴장 안에서 작품은 곧장 항공 재난 액션물의 정체를 드러낸다.
이 작품의 재미를 떠받치는 건 승객의 생사를 좌우하는 항공 재난 액션,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등장인물들이다. 폭탄으로 구멍 난 기체 안으로 맹렬한 바람이 휘몰아치고, 비행기가 수직 낙하하거나 상승할 때마다 승객들은 고꾸라지고 날아다닌다. 각종 소품의 격동적인 움직임까지 더해져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형성된다. 여기에 제 역할에 충실한 다채로운 조연은 재난 상황의 디테일을 끌어올린다. 경상도 출신의 용맹한 중년 사업가, 신혼여행 길에 오른 수줍은 젊은 부부, 성공한 검사 아들과 농인 어머니 등 생존의 위협에 맞닥뜨린 인물들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각자의 성격과 방식대로 대응하고, 이들의 간 졸이는 에피소드가 조각조각 모여 지루할 틈 없는 이야기를 완성한다.
관객의 몰입감이 한층 높아지는 건 이 과정에서 당시의 비극적인 시대적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가늠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1969년 북한 간첩에 의해 대한항공 비행기가 납치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고, 영화는 그로부터 불과 2년밖에 흐르지 않은 1971년을 배경 삼았다. 남북 간 치열한 체제 경쟁이 엄연히 존재하던 때인 만큼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국민을 감시하고 괴롭히던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고, 그로 인해 핍박받던 누군가는 실패하면 죽음뿐임을 알면서도 기어코 비행기 납치라는 극한의 선택에 이른다. 극 중에는 납북을 예감한 승객들이 주민등록증을 잘게 찢거나 씹어 삼켜 신분을 숨기려는 장면도 등장하는데, 1969년 비행기 납치 당시 전문 지식이나 경험을 지닌 우리 국민을 되돌려보내지 않았던 북한 정권의 실제 만행이 되풀이될 것을 우려한 대응이었다.
무엇보다 '하이재킹'의 가장 큰 강점은, 이 모든 비극적인 실화를 소재로 다뤘음에도 '대중을 즐겁게 한다'는 상업영화의 본분에서 끝까지 이탈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극적인 전개와 오락적인 구성으로 관객이 영화적 감흥을 충분히 즐기게 한 뒤에는, 눈물이나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깔끔하게 집으로 떠나보내 준다. 50여 년 전 남북 대결 시대에 실재했던 사건을 영화로 재구성해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 걸맞은 태도다. 관람 이후 뭔가를 느끼거나 생각한다면 그건 관객의 몫일 뿐이라는 담백한 입장은 자칫 진부한 결말로 향할 수 있던 실화 기반 상업영화의 약점을 상쇄한다. '하이재킹'을 부담 없이 선택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게 해준 주요한 요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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