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와 코가 기억하는 서늘함…풀과 대나무로 한여름 나기

한겨레 2024. 6. 2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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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성의 욕망하는 공예
여름 나기 아이템
왕골로 함·방석·바구니·화문석
볏짚으로 만든 망태·빗자루 등
자연재료로 지구 살리는 솜씨
느티나무 모양을 무늬로 표현한 화문석. 모노콜렉션 제공

하지가 제철인 햇감자를 포슬포슬 분을 내 쪄서 설탕에 찍어 먹는 재미가 한창이다. 옥수수를 한솥 가득 찌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렇게 찐 감자와 옥수수는 싸리채반이나 대나무바구니에 식혀야 제맛이다. 맛이야 달라지겠냐마는 스테인리스망이나 통풍이 되지 않는 접시보다는 한결 빠르게 식고 눈으로 시원하다. 여름은 찻자리의 세팅도 달라지는데 대나무로 엮은 매트와 모시 찻잔 받침을 깔아 시원한 운치를 더하고 침구는 삼베로 짠 이불로 열대야를 대비한다. 합죽선·단선 등 대나무 살에 한지를 붙인 부채가 3개 있는데 집안에서 자주 앉아 쉬는 곳곳에 손이 편하게 닿도록 두었다. 동양화를 취미로 그리는 지인에게서 청포도·기러기·대나무 등을 먹으로 직접 그린 부채를 몇해째 선물 받아 든든한 여름 동무가 되었다. 에어컨을 청소하고, 여름 옷을 꺼내 세탁하는 것만큼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 전에 여름용 살림도구를 정돈하며 훌쩍 들이닥친 무더위를 가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나만의 의식이다. 3개월 남짓 강렬하게 지나갈 더위는 추위 못지 않게 지혜로운 대비가 필요한 법이다. 주로 에어컨의 도움을 받을 터라 여름 살림도구가 굳이 있어야 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여름에 최적화된 공예품으로 시각·촉각적으로 청량함을 느끼고 여름만의 정취와 풍류를 즐기는 것도 열기를 식히는 근사한 방법이기에 아직 갖지 못해 사진첩에 고이 저장해둔 여름 살림 위시리스트를 소개한다.

피부가 기억하는 미세한 서늘함

촘촘하고 섬세한 짜임이 돋보이는 허성자 완초장의 화병. 박효성 제공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은 돗자리에서 뒹굴거리며 책을 읽다가 까무룩 낮잠에 들었던 장면으로 남아있다. 피부에 닿던 미세한 서늘함과 은은한 왕골 냄새도 기억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아무런 무늬 없이 가늘고 촘촘하게 짠 화문석에는 파란색 양단을 둘러 포인트를 주었다. 기억 저장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화문석에 대한 기억과 애정을 다시 꺼내게 된 것은 모노콜렉션의 느티나무 패턴 화문석을 만났을 때다. 청와대 상춘재의 느티나무 바닥재를 모티프로 그린 패턴을 픽셀 형식의 사각형으로 변형해 그래픽 디자인의 멋을 담은 화문석이다. 한국 전통의 미감과 자연의 가치를 자신만의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장응복 디자이너의 손길 덕분에 미니멀해진 화문석이 현대의 공간에서도 적절하게 어우러진다. 화문석의 재료는 왕골이다. 물가에서 자라는 사초과 일년생 풀인데 8~9월이면 1.5~2m에 이르는 왕골을 수확해 사용한다. 몇날을 햇빛과 이슬 속에서 말리면 질기고 윤기가 생겨 화문석을 만들기에 좋은 재료가 된다. 신라 시대에 화문석 제작을 담당했던 관청에 대한 기록이 있어 그 역사도 유구하고 고려·조선 시대에는 수출·조공품에서 빠지지 않는 명품으로 소문이 자자했고 지금은 강화도의 공예품으로 유명하다.

왕골을 재료로 사용하는 완초공예품도 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완초는 왕골의 다른 이름인데 함이나 바구니, 방석 등 작은 일상 용품을 제작하는 장인(완초장)은 국가무형유산이다. 2021년 서울 가회동 ‘예올 북촌가’에서 열린 허성자 완초장 이수자의 전시를 보고 완초공예의 멋을 알게 됐다. 왕골 산지와 완초공예로 유명한 강화도에서 나고 자란 허성자 장인은 좋은 재료에 촘촘한 솜씨를 더해 조형미와 쓰임새 모두 아름다운 완초공예품을 선보였다. 그의 완초 화병에선 곡선을 유려하게 표현하는 장인의 솜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완초를 공예품의 재료로 완성하는 부단한 과정을 영상으로 보여주며 소재와 완초공예의 이해를 높여준 게 이 전시의 백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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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와 보리, 부들, 대나무, 갈대……

토종볏짚을 가지런히 담백하게 엮은 황정화 작가의 볏짚함. 박효성 제공

안목과 앎을 모두 이끌어주는 좋은 전시를 자주 찾고 보아야 하는 이유를 이때 새삼 깨달았는데 최근 이 명제를 다시 확인해준 전시를 만났다. 서울 계동 갤러리 ‘표고’에서 지난 4일까지 진행된 ‘가지런히’ 전시에선 황정화 작가가 토종 볏짚으로 엮은 단정한 기물들을 소개했는데 보는 이의 마음까지 단단하게 엮어버린 듯 눈을 뗄 수 없었다. 대가 굵은 토종 볏짚을 갈무리해 고드랫돌로 걸어 발을 짜듯 엮은 반듯한 함에는 김밥을 담고 싶고, 쌀 낟알이 달려 있던 줄기인 홰기를 모아 실로 감은 빗자루는 현관에 두고 상서로운 것을 쓸어버리고 복된 것을 쓸어모으는 의미로 쓰기를 작가는 권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농사를 짓던 옛 시절에는 볏짚으로 각종 생활용품을 만드는 일은 당연했고 집집마다 누구나 만들었을 짚풀공예가 이제는 우리 일상과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아쉬워 할 뿐이었는데 이걸 특별하게 여기고 다시 우리 곁에 머물 수 있게 엮어주는 황정화 작가의 손길이 감사하다. 수년간 경기도 광주에 있는 풀짚공예박물관을 오가며 전성임 관장님의 수업을 듣고 서울 혜화동에 있는 짚풀생활사박물관 인병선 관장님의 저서를 디딤돌 삼아 익혀 온 여정은 농사를 짓듯 정성스러웠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짚풀공예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 때문에 두 박물관을 모두 가고 싶었지만 당장 경기 광주까지 달려갈 수 없어 혜화동 짚풀생활사박물관을 먼저 찾았다. 마침 짚풀 재료 12종으로 제작한 생활도구 유물과 짚풀 문화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짚풀, 4컷’이라는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어 재미있게 관람했다. 버들의 줄기로 만든 동고리(다용도 함), 댕댕이덩굴로 엮은 바구니, 왕골로 짠 저자망태(시장 갈 때 여인들이 든 가방) 등은 지금 당장 주문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도서관에 들러 인병선 관장님의 저서 ‘우리 짚풀문화’도 빌려왔다. 전시는 7월31일까지 열리고 매주 토요일에는 짚풀체험 프로그램도 신청할 수 있어 다음에는 볏짚으로 복조리와 달걀꾸러미를 만들어 볼 참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공예품들의 재료는 흔하디흔한 풀이다. 왕골, 벼와 보리, 부들, 대나무, 갈대 등이 대표적인 짚풀공예 재료다. 재료는 흔한데 공예품은 드물고 귀해졌다.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지혜롭게 다루고 수수하고 덤덤한 미감으로 살림 도구로 만들어낸 솜씨에 다시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다. 우리 전통이라서가 아니라 병들어 가고 있는 지구에 해롭지 않은 미래를 위한 솜씨이기 때문이다.

박효성 리빙 칼럼니스트
잡지를 만들다가 공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우리 공예가 가깝게 쓰이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가꿔주길 바라고 욕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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