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처럼 뿌리로... 쑨원의 고향과 화교 귀향촌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기행]

2024. 6. 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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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영남 광동 ④중산 손중산고거, 카이핑 조루
중산 쑨중산고거기념관에 그의 친필 '천하위공'이 새겨져 있다. ⓒ최종명

쑨원의 고향은 광저우에서 남쪽으로 100㎞가량 떨어져 있다. 중산(中山) 시다. 북송 시대부터 샹산(香山)이었는데 1925년 이름을 바꾼다. 국부에 대한 존경이었다. 한 인물의 호를 전국의 공원이나 도로에 이토록 무수히 사용하는 경우는 유일무이하다. 봉건시대를 끝장낸 신해혁명의 주연이었다. 시내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17㎞ 떨어진 기념관으로 간다. 1956년 고향 일대를 정비해 개방했다. 입구 담장에 친필로 쓴 천하위공(天下爲公)이 보인다. 평생에 걸쳐 가장 많이 쓴 글자다.


국부에 대한 존경, 쑨중산기념관

중산 쑨중산고거기념관의 중산정. ⓒ최종명

다리 셋 달린 솥이 서 있다. 1999년에 주조한 중산정(中山鼎)이다. 쑨원의 출생 연도인 1866㎜를 원통 지름으로 승화했다. 높이는 사망 연도인 1925㎜로 맞췄다. 봉건제도를 넘어뜨리고 중화민국을 건국한 1912년은 기단 너비로 환원했다. 몸통에는 나라에 대한 애정을 담은 유언 145자가 적혀 있다. 문장 부위의 높이는 590㎜인데 삶을 누린 향수(享壽) 59년을 참고했다.

중산 쑨중산기념관의 경세종. ⓒ최종명

바로 옆에 종이 있다. 신해혁명 90주년을 기념해 2001년에 제작한 경세종(警世鐘)이다. 지름 1.2m, 높이 2m, 무게 1.5톤에 이른다. 천하위공과 함께 쑨원의 사상을 잘 드러낸 공진대동(共進大同) 친필이 새겨져 있다. 뒤쪽에는 연설문을 새겼다. 1924년 5월 20일 광저우에서 전 국민을 향해 피 끓는 각성을 촉구한 명연설을 담았다. 당시 한 신문사가 육성을 녹음해 보관했다. 유일한 육성이라 연설문도 유명세를 타고 있다.

쑨중산기념관의 조각상. ⓒ최종명
쑨중산기념관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진. ⓒ최종명

1999년에 기념관을 중건했다. 평생의 사료를 진열하는 전시관이다. 동으로 제작한 입상이 정면에서 맞아준다. 아버지 손달성과 어머니 양씨의 사진이 보인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마카오에서 제화공으로 살다가 귀향 후 소작농이 됐다. 슬하에 6남매를 두었으나 둘은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요절했다. 쑨원은 태평천국 민란 이야기를 노병으로부터 늘 들으며 자랐다. 어린 시절 반청운동의 영웅을 동경했다. 형이 황무지를 개간하고 목축과 상업을 하면서 형편이 좋아졌다. 10살부터 사숙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쑨중산기념관의 쑨원 사진. 흥중회를 조직할 당시의 모습이다. ⓒ최종명

형의 지원으로 어머니와 함께 미국 호놀룰루(檀香山)에 가서 공부했다. 홍콩에서 기독교 세례를 받고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의사 면허를 딴다. 20대 후반에 청나라 황실의 무능과 외세 침략에 분노를 느끼기 시작한다. 다시 하와이로 간 쑨원은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한다.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며 대중 정부 창립’을 기치로 내건 최초의 민주혁명 단체다. 국민당의 맹아라 할 수 있다.

쑨중산기념관에 신해혁명 후 임시 대총통에 선출돼 연설하는 모습의 사진이 걸려 있다. ⓒ최종명
쑨중산기념관에 전시된 중화민국대총통선언서. ⓒ최종명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한다. 임시 대총통에 선출된다. 역사의 신기원을 이룬 사진 자료다. 쑨원은 중화민국대총통선언서(中華民國大統領宣言書)를 낭독한다. ‘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血鍾一鳴), 민란의 깃발이 사방에서 솟구친(義旗四起)’ 기분을 절절히 담았다. ‘오로지 나는 4억 명(四萬萬) 동포 모두의 귀감이 되리라’는 선언이다.

쑨중산기념관에 59세로 서거한 장면을 담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최종명
난징 중산릉의 '박애' 패방. ⓒ최종명

1925년 3월 12일 오전 9시 30분경 베이징에서 서거했다. 군벌이 할거하던 시기다. 협상을 통해 통일을 이루려던 시도는 달성하지 못했다. 민족, 민권, 민생을 추구하는 삼민주의의 신봉자였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 소련의 지원을 통해 미래를 담보하려던 꿈도 사라졌다. 국장을 치른 후 베이징 서쪽 벽운사에 임시로 안장됐다. 1929년에 이르러 국민당 수도 난징으로 옮겨졌다. 중산릉에 영구 안치됐다.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한 박애 정신이 새겨진 패방이 기억난다.


쑨원의 고향 추이헝촌(翠亨村)

중산 추이헝촌의 중산고거 2층 건물. ⓒ최종명

바로 옆에 추이헝촌(翠亨村) 민가가 조성돼 있다. 쑨원이 태어난 고향이다. 문으로 들어서면 붉은 2층 건물이 보인다. 1892년 미국에 거주하던 형이 자금을 송금했다. 쑨원이 설계하고 건축했다. 중국식 바탕에 서양풍을 혼합한 양식이다. 외지에서 의사로 활동하던 시절 고향에 돌아오면 머물던 저택이다. 광주 의거 실패 때도, 대총통에서 사임한 후에도 귀향하면 근무처이기도 했다.

중산 추이헝촌의 조의제. ⓒ최종명

골목을 따라 돌면 조의제(朝議第)가 나온다. 광서제 시대 조의대부 작위를 받은 양계원이 지은 저택이다. 아들 양허는 어린 시절 쑨원의 동무였고 혁명운동의 동지였다. 당시 대련인 덕문계범(德門啓範), 수우장춘(壽宇長春)이 여전히 보존돼 있다. ‘덕행 높은 가문이 모범을 세우고, 장수 집안이 오랫동안 생기가 넘친다’는 뜻이다.

중산 추이헝촌의 화교 가정. ⓒ최종명

주민들은 해외에서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며 살았다. 민국 초기에 해외로 나간 집안이 100여 가구나 됐다. 고향으로 돌아온 화교가 다시 집을 짓고 살았다. 교권가정(僑眷家庭)이라 불렀다. 가난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민란과 외세 때문에 도피한 사람들이다. 봉건이 사라지고 공화정이 들어서니 낙엽귀근(落葉歸根)처럼 귀향했다. 당시 영남 일대에 귀향 화교촌이 많았다.


여기저기 삐쭉 솟은 건물의 정체

카이핑의 세계문화유산 자력촌 조루. ⓒ최종명

광저우에서 서남쪽으로 2시간 거리인 카이핑(開平)으로 간다. 200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루군(碉樓群)이 있다. 기차역에서 서쪽 외곽에 위치한 자력촌(自力村)까지 30분이 걸린다. 조루는 원래 방어용 망루로 명나라 말기에 처음 생겼다. 고층이라 주거공간으로 활용하니 홍수가 나도 안전하다. 20세기가 되자 해외 화교들이 귀향해 건축하기 시작했다. 세계문화유산 표지석을 세울 만큼 독특했다. 크고 작은 규모의 조루가 모두 15채다.

카이핑 자력촌의 조루 '엽생거려' 앞에서. ⓒ최종명

평지에 느닷없이 고층 건물이 있으니 낯설다. 날씨가 쾌청한 덕분에 연못에 반영된 조루가 예쁘다. 꼭대기에 엽생거려(葉生居廬)가 또렷하다. 나뭇잎이 살아가는 오두막이란 표현이다. 주인의 소박한 정서가 느껴진다. 홍콩 화교 상인인 팡광콴이 지었다. 관생거려(官生居廬)와 난생거려(瀾生居廬)도 있다. 삼 형제가 나란히 살았다. 팡광콴이 항일전쟁 시기 홍콩에 다녀오다 비적에 잡혀 사망했다. 형제는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2006년에야 먼지를 털어내고 지금 모습으로 공개됐다.

자력촌의 조루 '난생거려' 부뚜막. ⓒ최종명
자력촌 조루 '난생거려'의 신위. ⓒ최종명

골목으로 들어서니 난생거려가 나온다. 형제 중 팡광인이 1936년에 지은 3층 건물이다. 부뚜막과 문을 관장하는 조군(灶君)과 문관(門官) 신위가 있다. 거실에는 당시 사용하던 생활 도구가 보존돼 있다. 오랜 전통의 고촌이 아니라 그저 조루 안에 조상을 모신다. 도금으로 치장해 눈부실 정도로 화려하다. 태양을 중심으로 신화에 등장하는 기린과 봉황이 생생하다. 꽃과 구름, 나무와 새도 세밀하게 묘사했다. 조상에 대해 강렬한 신앙을 드러내는 영남이다.

자력촌 조루 양한별장과 용승루. ⓒ최종명
자력촌 조루 거안루와 안려. ⓒ최종명

골목을 나오니 추수를 끝낸 들판이다. 왼쪽으로 조루 몇 채는 별장이라 부른다. 5층 높이 양한별장(養閒別墅)이 날씬한 차림이다. 붉은 창문을 설치했고 옥상에는 테라스가 있다. 오른쪽으로 3층 조루인 용승루(龍勝樓)가 보인다. 1917년 방문용과 방문승 두 형제가 함께 살았다. 이름에 우애가 잔뜩 묻어난다. 자력촌에서 가장 먼저 자리 잡았다. 뒤쪽으로도 몇 채가 줄줄이 이어진다. 가장 멀리 쌍둥이처럼 붙은 조루가 나타난다. 1922년의 거안루(居安樓)와 1926년의 안려(安廬)다. 곁에 지은 이유가 궁금하다. 해외에서 함께 동고동락 정도는 했을 듯하다.

자력촌 조루 명석루의 4층 침실. ⓒ최종명
자력촌 명석루에서 본 또 다른 조루 ⓒ최종명
자력촌 조루 운환루 옥상. ⓒ최종명

자력촌 중심에 명석루(銘石樓)가 위치한다. 1925년에 건축됐다. 4층인데 층마다 주방과 거실, 서재와 침실의 위치와 구조가 똑같다. 맨 위층에 가장이 살았던 듯하다. 생활 도구나 침대가 고가품이다. 옥상으로 올라가니 농촌 풍광이 펼쳐진다. 5층 높이의 운환루(雲幻樓)가 보인다. 테라스도 속속들이 보인다. 꼭대기에 길게 글자가 적혀 있다. 천간과 지지를 하나씩 따서 사용하는 세차가 가운데에 있다. 중화민국십년세차신유(中華民國十年歲次辛酉)라 적었다. 민국 10년인 1921년 신유년에 지었다.


낙엽귀근(葉落歸根), 고향으로 돌아온 화교 상인

카이핑의 조루 입원 입구. ⓒ최종명

카이핑에는 조루 마을이 많다. 자력촌에서 입원(立園)으로 간다. 한꺼번에 관람하는 통표(通票)를 사면 두 곳을 잇는 무료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1936년 미국 화교 상인 세웨이리(謝維立)가 건축했다. 이름 끝 자가 ‘세우다’는 뜻이라 중첩인 듯 어울린다. 약 2만㎡ 규모로 전통 원림과 수향에 서양 건축양식이 결합됐다. 조루도 많고 정원과 도랑과 정자까지 배치한 아방궁이다.

카이핑 입원의 반입루와 형려. ⓒ최종명
입원 반입루에 전시된 생활도구. ⓒ최종명

반입루(泮立樓)가 나온다. 반(泮)은 공자 사당 앞 연못을 뜻하지만 세웨이리가 아버지 세성반(謝聖泮) 이름을 차용했다. 바로 옆에는 숙부 세성즁의 별장인 형려(炯廬)가 있다. 반입루는 3층 반(半) 건물이다. 세씨 집안은 이름에 집착과 자부심이 상당했던 듯하다. 지면과 계단은 모두 이태리석으로 꾸몄다. 나무 탁자와 동으로 만든 식사도구도 고스란히 전시돼 있다.

입원 반입루의 삼빙제갈 벽화. ⓒ최종명
입원 반입루의 점병도 벽화.ⓒ최종명

대문 안쪽에 대형 벽화가 그려져 있다. 유비의 제갈량 삼고초려인 삼빙제갈(三聘諸葛)이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도 벽화가 걸렸다. 당나라 현종 시대 재상인 장구령의 점병도(點兵圖)가 있다. 황제에게 안녹산 반란을 경고했던 인물이다. 문관으로서 병사를 소집하는 장면이다. 광둥 출신으로 영남제일인(臨南第一人)이라 불린다. 중국 상인은 그냥 장사치가 아니다. 거상일수록 역사문화에 조예가 깊다.

카이핑 입원의 조루 반문루. ⓒ최종명

뒤쪽에 사촌 형 세웨이원이 거주한 반문루(泮文樓)가 있다. 건축 양식이나 구조가 거의 비슷하다. 동상 아래 글귀 해납백천(海納百川)에 시선이 간다. 동진 시대 원굉이 쓴 삼국명신서찬(三國名臣序贊)에 수록된 말이다. 엄청나게 많은 강물을 다 포용하는 바다를 이른다. 육지는 용이 날아올라 구주를 질주한다는 용등구주(龍騰九州) 기세다. 상인이라면 이 정도 욕심과 과장은 대수도 아니라는 뜻이다.

입원의 본입도생 패방과 타호편. ⓒ최종명

강남 수향을 닮은 도랑길을 따라가면 본입도생(本立道生) 패방이 나타난다.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는 논어를 인용한 포부다. 높이가 20m나 되는 철근 구조물인 풍수간(風水杆)이 불쑥 나타난다. 건축 당시 미국 사업이 갑자기 나빠졌다. 풍수를 잘못 썼다고 생각해 점을 봤더니 맞은편 호산을 지목했다. 독일에서 호랑이 때리는 채찍을 두 개 주문해 설치했다. 타호편(打虎鞭)이라 부른다. 가업이 다시 번창했다.

카이핑 입원의 반입루가 연못에 비친 모습. ⓒ최종명

연못에 비친 반입루가 보인다. 북송 시대 석도원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혜능의 고사'를 남겼다. 혜능은 선종의 6대 조사다. 열반이 가까운 스승에게 제자가 언제 다시 현생에 오는지 물었다. 낙엽귀근(葉落歸根)이지만 내시무구(來時無口)라 했다. 근원으로 돌아가지만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화교 상인은 고향에 돌아와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았다. 주인 떠난 자리에 손님이 말없이 잠시 다녀간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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