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비상사태가 아니라 사회 비상사태다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4. 6. 2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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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의 견문발검]

[미디어오늘 이송희일 영화감독]

▲ 19세기 목화 농장.

19세기 북미의 흑인 여자 노예들은 목화 뿌리를 씹었다. 카리브해의 노예들은 약초를 씹었다. 민간 피임법이었다. 아이를 갖지 않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흑인 노예의 재생산에 관심이 없었다. 노예가 부족해지면 서아프리카에서 끌고 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19세기 초 노예 무역이 금지되면서 농장주들이 흑인 노예의 감소에 대해 각별히 주위를 기울였다. 토마스 제퍼슨은 성인 노예보다 아이 노예가 두 배의 가치가 있다고 공공연히 떠들 정도였다.

농장주 입장에서 노예의 피임은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곧이어 '영아 살해'가 등장하자 농장자들이 공포에 휩싸인 채 노예들을 부랴부랴 단속했다. 비참한 영양과 위생 때문에 영아가 죽어간 것을 영아 살해로 오인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산모와 흑인 산파가 영아를 살해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요컨대, 처절한 재생산 저항이었다. 출산 파업이었다. 자식에게 고통스러운 노예의 삶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목화 뿌리를 질겅질겅 씹었던 것이다. 농장주는 인구 감소를 걱정했지만, 노예들은 삶의 추락에 절망했다. 삶이 절망일 때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삶의 재생산 중단이었다.

최근 하루가 멀다하고 정부와 언론이 인구 감소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고 해괴한 저출생 대책을 내놓고 있는데, 그때마다 목화 뿌리를 씹던 여자 노예들의 마음을 떠올리곤 한다. 그 허다한 대책들 어디에도 사람과 우리의 삶을 걱정하는 소리가 없다. 노예 노동력 감소에 당황하던 농장주들의 비명만이 존재한다.

케겔 강화 댄스로 괄약근을 조이고, 정관 수술비를 지원하며, 여학생 조기 입학을 권장하는 괴이한 인구 대책들을 보고 있자면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곰에게 쑥과 마늘을 먹여 인간으로 변신시키는 게 인구 증가에 도움이 되겠다. 급기야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며 초등생들에게 야간자율학습을 시키고 부부들의 성생활을 독려하자는 윤석열 정부의 강구책은 B급 코미디의 정점을 찍는다.

▲ 6월19일 윤석열 대통령은 HD현대 아산홀에서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을 주제로 '2024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회의'를 주재했니다. 사진=대통령실 홈페이지

시민들은 '사람'을 낳고 싶지만, 지배 권력과 자본은 '인구'를 낳기를 바란다. 사람이 사람 대접을 못 받으니 아이를 안 낳는 것이다. 아무리 그럴 듯한 말과 갖은 공포의 언어로 치장해보았자 단순히 사람을 인구로 수단화하고, 그저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 납세 의무자, 소비자로만 대상화하면 시민들은 출산 파업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고단한 삶이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한쪽에선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데 한쪽에선 아동을 해외로 수출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대 아동 수출국이다. 한쪽에선 아이를 낳으라 극성을 피우는데, 다른 한쪽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끓는다. 하루에 35명꼴,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다. 통렬한 위선이 아닐 수 없다.

아이를 낳으면 뭣할까. 초등학생부터 무한경쟁에 시달려야 하고, 그러다 남자는 조금 자라면 군대 가서 얼차려 받다 죽고, 여자들은 데이트하다가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심지어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속에서 평생 노동을 착취당하는 세상에서, 미친 부동산 가격에 자기 집 하나 건사하기 힘든 세상에서, 그런데도 여야가 합심해 종부세 완화로 뻔뻔하게 불평등을 조장하는 세상에서 아이를 낳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 지옥에서 이윤을 추출하려는 자본과 지배 권력자들일 뿐이다.

우리는 통치 기제인 '인구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사회의 방향타를 인구가 아니라 피와 살갗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이 아니라 돌봄과 삶의 재생산으로 돌려야 한다. 사람이 사람 대접을 받고 사는 것, 그것이 유일한 인구 해법이다. 다시 말해 가장 좋은 인구 정책은 더 이상 인구를 말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사람들이 어떻게 어울려 다정하게 살아갈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토양이 풍요로워지면, 자연스레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죽은 땅에서 열매를 맺으라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꽃은 피지 않는다.

▲ 6월24일 MBC뉴스 “공장서 쓰러진 19살 수첩엔 '내년까지 4천 모아 군입대'” 기사 갈무리

얼마 전 제지공장에서 숨진 19살의 젊은 노동자는 수첩에 영어와 음악을 배우고 친구들에게 잘할 것을 다짐하는 빼곡한 소망과 꿈을 적어놓았다. 젊은이들이 일하다 죽는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인가. 질병사까지 합하면 이렇게 하루에 산재로 6명꼴로 죽어나가는 나라에서, 이웃나라에 돈 벌러 왔다가 안전요령 숙지도 없이 이주노동자들이 속절없이 불타 죽는 나라에서, 인구가 부족하니 애 낳으라고 윽박지르는 것. 인구 감소보다 그게 더 무섭고 끔찍하다.

지금은 인구 비상사태가 아니라 사회 비상사태다. 총체적인 사회 재생산의 위기다. 목화 뿌리를 씹는 사람들에게 인구 타령은 그저 농장주들의 탐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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