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권', 전 세계의 뜨거운 감자 된 이유는? [스프]

박수진 기자 2024. 6. 29.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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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쉽] 미국 대선 뒤흔드는 '낙태권', 바이든의 돌파구 될까

얼마 전 우리나라 낙태, 임신 중지 문제에 대한 취재를 하게 됐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를 하는 당사자와 이를 돕는 의사 등을 처벌하는 기존의 낙태죄가 헌법에 맞지 않는다며 '헌법 불합치' 결정을 한 바 있습니다. 2020년까지 새 법을 만들라고 주문했지만 그 법은 아직까지도 만들어지지 않았고 햇수로 5년째 대한민국 법엔 낙태를 처벌한다는 규정도, 처벌하지 않는다는 규정도 없는 채로 '입법 공백' 상태입니다.

이 입법 공백이 야기하는 부작용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지고 있었습니다. 낙태를 돈벌이로 인식하는 일부 산부인과는 낙태가 '비급여'라는 현실을 악용해 환자마다 비용을 다르게 받으며 수익을 얻고 있었고, 불법 낙태약 시장은 위기에 몰린 여성들을 상대로 검증도 되지 않은 약을 개당 수십만 원에 팔며 몸집을 불리고 있었습니다.

▶ 관련 영상
뉴스토리 474회 <낙태죄 폐지 후 방치된 '임신 중지'>
[ https://youtu.be/MSjlTDFy2dw ]

헌재는 5년 전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을 하면서 여성의 건강권과 자기결정권을 중요한 가치로 다뤘습니다. 이 두 가지의 권리가 태아의 생명권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국회에 주문했습니다. 하지만 5년 동안 국회와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았고, 그 시간이 길어지는 사이 여성의 건강권과 자기결정권, 그리고 태아의 생명권은 어느 하나 제대로 보호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하는 현실입니다.

이 과제는 새롭게 문을 연 22대 국회의 몫이 됐습니다. 하지만 개원 한 달 동안 여야 어디에서도 대체 입법안은 발의되지 않았고, 정부도 새로운 개정안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오랫동안 지켜본 한 인사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당장 표와 연결되지 않으면 이 민감한 문제를 누가 먼저 나서서 다루려고 하겠어요?"

5년 전 헌재의 결정이 있기까지 한국도 임신 중지를 법으로 금지한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성단체와, 법으로 이를 더 보호해야 한다는 종교, 생명단체 간의 치열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이런 목소리를 대면한 정당 간의 입장 차도 명확했습니다. 이런 현실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돼 있지 않습니다. 낙태죄를 둘러싼 논쟁은 여성권과 생명 존중권이라는 구도 속에 깊은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그 역사적 논쟁은 2024년 전 세계의 정치 외교를 흔드는 현실의 이슈로 다시 부각 중입니다.
 

미국 대선을 흔드는 '낙태권'…'열세' 바이든의 새로운 돌파구?


미국에선 최근까지도 이런 말이 많았습니다. "내일 당장 선거를 한다면 트럼프가 당선될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우위를 점하는 경우가 많기도 했고요, 지난 4년 바이든 정권의 성적이 저조했기 때문도 있습니다.

불법 이민자가 늘고 있는 것, 그리고 먹고살기 힘들어지는 현실도 큰 원인 중에 하나지만 바이든 정권에게 가장 뼈아픈 것은 지지층을 등 돌리게 만든 두 개의 전쟁입니다. 바이든 임기 동안 벌어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세계 평화군'을 자처하는 미국은 별다른 역할을 못 하고 있단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지지층의 실망과 분노를 이끈 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이 속출한 점인데요, 이들은 약자 보호와 평화 지향, 전쟁 반대를 외치며 바이든 정권의 무능력함을 비판했고 바이든 대통령은 안팎으로 위기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런 바이든 대통령이 최근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비등한 결과를 보이는 등 역전의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달 25일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전국 여론조사 지지율 평균을 분석한 결과 바이든과 트럼프가 46%로 동률을 기록했습니다.

지난 9개월간 여론조사에서 바이든이 계속 지고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의미 있는 결과라고 뉴욕타임스는 해석했는데요.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유죄 평결이 있었기도 했고 경쟁률이 비등해진 이유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주요 배경에는 최근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낙태권 논쟁이 있습니다.


한국시간 6월 28일,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바이든과 트럼프의 첫 대선 토론회가 이를 방증합니다. 두 후보는 불법 이민자 이슈, 경제 이슈, 전쟁 이슈 등 다양한 현안에 대한 토론을 벌였는데 이 중엔 낙태권 문제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토론을 주최한 CNN 측은 경제 현안과 관세 문제에 이어 세 번째 질문으로 낙태권에 대한 두 후보의 입장을 물었습니다.

첫 질문은 최근 연방대법원이 사용 승인을 한, 먹는 낙태약과 관련한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이었는데요. 트럼프는 '대법원이 사용을 승인했으니 이를 막을 생각은 없다'고 말하며 지난 2022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뒤집은 사실을 먼저 꺼내 들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주요 발언
"51년 전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있었고 모든 사람은 그것을 주의 결정으로 돌려주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은 각 주에서 그것을 통제합니다."
"낙태는 급진적입니다. 민주당 주지사가 재임하던 주에선 임신 8개월, 9개월 된 아이의 생명도 앗아갑니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해 국가가 함께 논의하기 위해 모이고 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 주요 발언
"당신이 한 일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정치인들이 여성 건강에 대한 결정을 내리길 원한다는 생각은 터무니없습니다. 어떤 정치인도 그런 결정을 내려선 안 됩니다. 제가 당선된다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부활시킬 겁니다."

▶ 관련 기사
트럼프 전 대통령-바이든 대통령 토론 전문
[ https://edition.cnn.com/2024/06/27/politics/read-biden-trump-debate-rush-transcript/index.html ]

두 후보가 설전을 벌인 로 대 웨이드 판결은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임신 중단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라고 인정한, 낙태권 역사에 있어 중요한 판결입니다. 짧게 이 배경을 살펴보면 1970년 미국 텍사스주에 살던 한 여성이 성폭행을 당해 임신한 후 임신 중단을 하려고 했지만 텍사스에서는 낙태가 불가능했고 이를 이유로 텍사스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당시 여성의 가명이 '로'이고 주정부를 대표했던 검사가 '웨이드', 그래서 '로 대 웨이드' 사건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 사건을 심리했고 그 결과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로 인정하면서 이후 49년 동안 미국 사회는 이 판결을 근거로 낙태권을 존중해 왔습니다. 그러다 2015년 미국 미시시피주가 15주 이후의 임신 중단을 금지하는 주법을 만들겠다고 나섰고, 여성단체 등이 미시시피주를 상대로 위헌 소송을 제기합니다. 이 사건의 연방대법원 결정이 2022년 6월 나왔습니다.

"미국 헌법은 임신 중단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고, 헌법 어느 조항도 임신 중단권을 보호하지 않는다."

연방대법원 스스로가 1973년 자신들이 내린 결정을 뒤집은 겁니다.


이 결정 이후 낙태 허용 여부는 각 주의 판단이 기준이 됐습니다. 14개 주에서 낙태가 금지됐고 7개 주는 낙태 허용 기간을 기존 로 대 웨이드 결정 당시 제시했던 기간보다 짧게 규정했습니다. 이런 결정이 시대 퇴행적이라고 비판하는 시민단체와 민주당은 그 탓을 트럼프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재임 시절 연방대법원 대법관을 보수화시키면서 이런 결정이 났다고 보는 겁니다. 이후 미국 각 주에서 여성의 건강권과 자기결정권이 침해되는 결정들이 잇따르면서 낙태권은 미국 사회의 큰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실제 2022년 로 대 웨이드 폐기 판결 이후 치러졌던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했던 전례가 있기 때문에 바이든 측은 이 낙태권을 반등의 무기로 삼고 있고, 트럼프 측은 여론을 감안해 자극적 발언을 가급적 자제하고 있습니다. 논란이 되는 발언을 강조하며 세간의 이목을 끌어온 트럼프의 행보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낙태권이라는 논쟁이 보수-진보의 신념 대결보단 여성의 권리 보장이라는 측면이 강하고, 시대가 변하면서 낙태(abortion)를 임신 중지, 임신 중단(a termination of pregnancy)이라고 바꿔 부를 만큼 시각은 달라졌습니다. 두 후보 모두 기존의 정치 셈법으로만 접근하긴 어려워진 겁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싸우는 이유

지난 6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선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과 이탈리아 멜로니 총리의 갈등이 가장 관심사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갈등이 촉발된 표면적 이유는 낙태권이었습니다. G7 정상회의가 발표한 공동성명에는 기존에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던 낙태권이 빠졌습니다.

공동성명 중 성평등 분야에는 "우리는 포괄적인 성(性) 및 생식 건강과 모두를 위한 권리를 포함해 여성을 위한 적절하고 저렴하며 양질의 보건 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접근에 대한 히로시마 정상 선언문의 약속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고만 언급됐는데요. 지난해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의 공동성명에는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에 관한 접근성'이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최종적으론 빠진 겁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낙태권에 관한 기자들의 질문에 "프랑스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해지는 비전을 갖고 있지만 이것이 모든 정치적 입장과 공유되고 있진 않다"고 말했습니다. 멜로니 총리는 이에 대해 "정상회의 같은 소중한 자리를 이용해 선거 캠페인을 벌이는 것은 심히 잘못된 일"이라고 맞받아쳤습니다. 이 발언들의 배경은 무엇일까요?


프랑스는 지난 3월 세계 최초로 여성의 낙태할 자유를 헌법에 명시했습니다. 프랑스 상·하원의 압도적 찬성에 따른 결정이었는데요. 이번 개헌에 따라 프랑스 헌법 제34조에는 '여성이 자발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을 법으로 정한다'는 조항이 새로 추가됐습니다.

프랑스는 이미 임신 14주 이내 낙태를 전면 허용하고 있지만 낙태권을 헌법에 명문화한 상징성은 큽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가결 직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에 "프랑스의 자부심, 전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낙태권과 관련해 기념비적인 판결로 거론돼온 미국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폐기된 후 프랑스의 헌법 명시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마크롱이 낙태권에 이렇게 '진심'을 보이는 여러 배경 중 하나는 현재 직면한 정치적 상황도 큰 몫을 차지합니다. 올해 유럽의회 선거에서 마크롱의 집권 여당인 르네상스가 참패하고 극우 성향의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이 단독 1당이 되면서 마크롱은 의회 해산을 발표하고 조기 총선을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총선을 앞두고 여러 여론조사에서 극우 성향의 국민연합이 우세하고 있고 이를 저지하려는 반대 세력의 결집도 이뤄지는 모습입니다. 마크롱은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하는 것이 큰 과제가 된 상황인 셈.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마크롱을 향해 정상회의에서 선거운동하지 말라고 비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멜로니 총리는 순수하기만 할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외신에 따르면 G7 정상회의 공동성명에서 낙태권 명시가 빠진 이유는 멜로니 총리 때문입니다. 그가 이 문구의 삭제를 요청했다고 미국의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보도했습니다.

멜로니는 '기독교의 어머니'를 자처하는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1973년 이후 낙태권을 인정하며 임신 12주까지 낙태를 전면 허용하고 있는 이탈리아는 멜로니 총리 집권 이후 낙태권을 제한하는 법안을 잇달아 통과시키고 있습니다. 실제 낙태를 시술해주는 클리닉에 낙태 반대 단체들이 접근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멜로니 총리는 낙태 반대 입장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참석한 정상회의에 낙태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내용이 포함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순 없었을 겁니다. 정상회의 이후 마크롱과 멜로니의 갈등은 전 세계의 화제가 됐고, 낙태 합법화 바람이 불고 있던 유럽의 행보에 반기를 든 것이란 평가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사회적 합의의 영역이 돼버린 낙태권, 우리나라는?

주요 국가들에서 이렇게 낙태권에 대한 논쟁이 확산되면 우리나라도 비껴갈 순 없을 겁니다. 당장은 주요 이슈로 떠오르지 않고 있지만, 앞서 밝혔듯 낙태죄 대체입법이 5년째 이뤄지지 않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하긴 어렵습니다. 실제로 지난 5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한국 정부는 2019년 헌재 판결 이후 실질적인 제도 변화를 하지 않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지난 2020년 입법 예고했던 낙태죄 대체입법안, 즉 형법 모자보건법 개정안에서 임신 14주까진 전면 허용, 24주까지는 제한적으로 허용하도록 했습니다. 다만 낙태를 처벌하는 조항은 그대로 남겨둬 여성단체와 야당 의원들이 크게 반발했고 그 이후 논의는 진척되지 못했습니다.

지난 5월 14일 스위스에서 열린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회의에서 한 위원이 한국 정부의 낙태죄 폐지 후 입법 부재와 관련한 지적을 하고 있다.

의약계에 종사하며 임신 중절 의약품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 한 전문가는 임신 중지에 대한 여러 사회적 논의를 보며 이런 소회를 밝혔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박수진 기자 star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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