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시 자동 군사 개입’ 북·러 군사동맹, 한국 ‘3無 외교’ 결과
세상에서 가장 넘기 힘든 게 대한민국의 '레드라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타국이 아무리 위협을 가하거나 주권을 침해해도 한국 정부가 "좌시하지 않겠다" "강경 대응하겠다"고 수사(修辭)만 늘어놓은 채 실질적 조치는 취하지 않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정권을 막론하고 이 같은 외교 스타일이 고착되다 보니 여러 나라가 한국을 만만하게 보는 상황이다. 특히 북한과 러시아, 중국이 그렇다. 핵실험을 하거나 미사일을 쏴대도(북한), 군용기·군함으로 영공·영해를 위협해도(러시아), 각종 경제 보복에 나서도(중국) 한국은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대외정책은 무위(無爲)·무능(無能)·무괴(無愧) 등 '삼무(三無)'라는 게 필자 생각이다. 다른 나라가 어떤 도발을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무위요, 국제정세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니 무능이다. 그럼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대외정책에 자화자찬만 늘어놓으니 무괴다.
대한민국의 '레드라인'은 무엇인가
‘유사시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이 포함된 북한과 러시아의 새 조약 체결은 사실 놀랄 일이 아니다. 지난 10여 년간 미국·유럽·일본을 중심으로 한 서방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중국·러시아·북한·이란을 위시한 전체주의 진영의 대립이 심화됐다. 이와 동시에 북·러 양국 협력은 그동안 꾸준히 강화돼왔다. 미국이라는 공통의 적을 둔 두 나라의 협력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대규모 무기 거래로 가속화됐다. 이 같은 협력 움직임은 물밑 외교뿐 아니라 공식 교류에서도 여러 차례 확인됐다. 한국 정부에 의지만 있었다면 이번 양국의 조약 체결을 막지는 못해도 그 시점을 어느 정도 늦춰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에도 "러시아에 대한 제재 수위를 높이고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라"는 미국과 우방국의 요구를 듣지 않았다. 휴전 국가이자 대규모 정규군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 군수산업 인프라는 오랫동안 평화를 누린 유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따라서 한국은 마음만 먹으면 탄약 같은 전시 소모품은 물론, 전차·장갑차 등 무기체계를 미국, 유럽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대량생산할 수 있다. 이런 역량을 가진 한국이 미국,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보조를 맞춰 무기 지원에 나섰다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지금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 것이다.
외교당국의 잇단 오진(誤診)
국제정세와 북·러 관계가 급변하는 동안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한국의 무위 외교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무능도 드러냈다. 그간 한국 외교부 당국자들은 "오늘날 국제질서가 '신냉전'에 돌입했다는 정세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다. 심지어 외교관 양성 산실이자 외교전략 싱크탱크인 국립외교원의 모 교수는 푸틴 방북 하루 전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과 러시아의 협력은 단기적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며, '평양선언'이 나오더라도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을 포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판단은 신냉전체제 대응에 회의적인 외교부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히 하루 만에 '오진(誤診)'으로 드러났다. 격동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모든 진단과 예측이 맞아떨어질 수는 없다. 문제는 이미 정보당국으로부터 '북·러 동맹' 체결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나왔고,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신냉전이 대두됐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대외정책 성과를 과대평가하는 당국의 '무괴'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은 중앙아시아 3개국 순방 후 가진 국무회의에서 '글로벌 중추외교'라는 표현을 꺼냈다. 윤 대통령은 "이번 중앙아시아 순방은 정부의 글로벌 중추외교 비전이 상당한 정도로 실현됐음을 의미한다"면서 "글로벌 질서를 좌우하는 거대 게임을 정확히 읽어야 하고, 우리가 표방해야 할 분명한 대전략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은 신냉전이 심화되는 시대상을 인식조차 못 하고 있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정부가 '글로벌 질서를 좌우하는 거대 게임'을 정확히 읽고 '분명한 대전략'을 가진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른바 '글로벌 중추국가'라는 말은 그런 착각에서 나온 것이다. 중추(中樞·center)는 말 그대로 중심이라는 뜻이다. 한국은 절대적인 국력 수준만 놓고 보면 꽤 상위권에 속하는 선진국이다. 문제는 주변국 모두 강대국인 탓에 상대적 국력만 놓고 보면 열세를 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강대국 틈바구니에 있는 나라의 흥망성쇠를 결정한 것은 외교였다. 주변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꿰뚫고 능수능란한 외교정책을 구사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주변 정세를 오판해 쇠락하는 강대국에 베팅하거나, 자아도취에 빠지면 반드시 위기를 맞았다. 병자호란 때 조선 인조는 잘못된 외교정책으로 삼궤구고두례의 굴욕을 겪었고, 임진왜란 때 선조는 그토록 깔보던 '왜구'에 쫓겨 신의주까지 도망갔다.
미국의 대(對)중국 견제에서도 겉도는 한국
한국은 이런 상황이 남 일인 것처럼 한 걸음 물러나서 관망 중이다. 6·25전쟁 당시 한국을 도와준 자유민주주의 진영 우방인 미국과 나토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발을 뺀 것이다. 심지어 러시아가 북한과 사실상 군사동맹을 체결한 후에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표현하는 데 그쳤다. 미국이 동맹과 우방국을 모아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을 실시하고 중국을 겨냥한 군사협력을 강화할 때도 한국은 겉돌았다. 중국과 우호·협력도 중요하다는 이유로 미국 주도의 대(對)중국 견제 체제에서 제 역할을 하길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진영 일원이면서도 우방들과 다른 대외정책을 취하는 이유는 뭘까. 그 기저에는 스스로에 대한 과신(過信)이 깔려 있다고 본다. 한국은 스스로 '세계 10대 경제대국' '군사대국'으로 평가하며 국제사회에서 큰소리를 쳐도 된다고 착각하고 있다. 한때 한국 최고 권력자의 입에서 '동북아 균형자' '협상가'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와 같은 과신의 결과일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가 2개 진영으로 갈려 대립할 때는 각 진영에서 일정한 책임과 역할을 하는 나라가 대접받는다. 과거 나토 최전선을 지킨 서독, 옛 소련의 태평양 진출을 저지하는 최일선에 있던 일본이 그랬다. 이들 나라는 제 역할을 다한 덕에 미국으로부터 집중 지원을 받아 경제대국이 됐다. 지금 유럽 각국 지도자가 어려운 정치·경제 상황에도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확대하고 파병 가능성까지 거론하고 나선 것은 그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자국이 속한 진영에서 제 몫을 하는 만큼 국제적 위상이 오르고 발언권도 커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래야만 같은 진영 우방국은 물론, 상대 진영 나라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진짜 강대국 대우를 받을 수 있다.
대한민국 번영의 시계 멈출라
지금 한국은 위기다. 세계가 서로 편 가르고 싸울 준비를 하는 상황인데도 한국은 마치 그런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듯 태평하다. 한국 안보에 심각한 위협으로 등장한 북·러 군사동맹은 무위·무능·무괴 3무 외교로 자초한 위기다. 지금이라도 고장 난 외교안보 라인을 일신하고 대외정책을 전면 수정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번영의 시계는 여기서 멈출 수도 있다.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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