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잊지 않을게요”

KBS 2024. 6. 29.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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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난 화요일은 6.25 전쟁 74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참전용사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는데요.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잊지 말아야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참전용사들, 그중에서도 특히 전쟁터에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국군포로들과 그 가족들이 있는데요.

그분들의 희생을 기억하기 위한 특별한 공간이 마련됐다고 합니다.

그 현장을 김옥영 리포터가 다녀왔습니다.

함께 보시죠.

[리포트]

'전사했다는 통지를 받았는데 50년 만에 살아있다고 하니 누가 믿겠어.'

6.25 종전 50년 만에 탈북해 남측으로 돌아온 국군포로의 회상입니다.

형제들과 처음 연락이 닿았던 순간이 담담한 필체로 기록됐습니다.

귀환 국군포로 구술을 기록한 사업의 결과물이 13년 만에 일반에게 공개된 겁니다.

20일 개관한 전쟁기념관 '국군포로 전시실'에 소장된 자료입니다.

중공군 포로 증명서와 영국군의 포로 수기와 같은 관련 유물들도 관람객들의 관심을 모았는데요.

[신단비/관람객 : "평소에 그렇게 깊이 생각한 건 없었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마음이 슬프고 안타깝고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공부해서 가려고 왔어요."]

["정전협정 당시 유엔군 사령부는 국군포로와 실종자 수를 8만2천여 명으로 추산했습니다. 북한은 이 가운데 8,343명만 송환했는데요. 74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귀환 국군포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두 명의 여성이 전시실을 찾았습니다.

탈북민 송명화 씨와 최순애 씨.

이들의 아버지들은 북한에서 '43호'로 낙인찍힌 국군포로였습니다.

전시물 중에는 명화 씨가 집필한 책도 포함돼 있는데요.

[송명화/국군포로 유가족 :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에게는 '43호'라는 부호가 붙어 있었어요. 저는 국군포로 43호 자녀로 태어나서 43호는 침묵을 지켜야 살 수 있었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포로가 된 뒤, 늘 고향을 잊지 못했다는 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경상남도 사람이지만 좀 무뚝뚝하지만 자상한 사람."]

광산에 배치돼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1984년 폐암으로 숨졌습니다.

[송명화/국군포로 유가족 : "군번이 K라는 것까지 저한테 다 알려주면서 그래서 조국 통일이 되면 꼭 내 묘를 파서 고향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2000년 탈북한 최순애 씨에게도 국군포로 아버지는 애달픈 그리움입니다.

[최순애/국군포로 유가족 : "(아버님 생각이 나는 것들이 있을까요?) 이 놋그릇, 밥그릇이요. 우리(북한) 것은 커요. 거기가 탄광 일이 힘드니까 밥을 진짜 한 그릇씩 잡수고 그랬어요."]

아버지 최기열 씨는 함경도 온성광산의 깊고 험한 굴에서 석탄을 캤다고 합니다.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는 아버지의 베갯잇.

["석탄 캐내는 거 하니까 항상 베갯잇이 새까맣게 돼 있었어요."]

순애 씨 아버지는 체제 불만을 말했다는 이유로 가족들 앞에서 처형당했습니다.

[최순애/국군포로 유가족 : "6살 때인가 그때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어디로 데리고 가더라고요. 조금 있다 총소리가 나더니 총살했어요. 그래서 근데 막 엄마가 울더라고요. ]

2006년 탈북한 명화 씨는 천신만고 끝에 아버지의 유해를 국내로 송환했다고 합니다.

대전 현충원에 태극기에 싸인 관이 들어섭니다.

아버지의 유언이 비로소 이뤄진 순간이었는데요.

[손명화/국군포로 유가족 : "고향에다가 묻어 달라고 하던 아버님의 유언을 제가 지켜드린다고 애쓰던 끝에 끝내 아버지를 대한민국의 품에..."]

6.25 전쟁 이후 북에서 남으로 송환돼 현충원에 안장된 국군포로 유해는 7구입니다.

모두 가족과 민간단체의 주도로 진행됐는데요.

[손명화/국군포로 유가족 : "오고 싶어서 눈을 감지 못하고 죽은 국군포로들을 지금이라도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유해 한 구 한 구를 모셔 왔으면 좋겠다..."]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온 귀환 국군 포로 생존자는 현재 9명입니다. 이중 대부분이 90대 이상 고령인데요. 이들은 어떤 기억 그리고 또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을까요."]

1994년 고 조창호 중위가 처음으로 생환한 이후 80명의 국군포로가 탈북 등을 통해 남한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대봉 할아버지는 그 생존 9명 중 한 명입니다.

["안녕하세요."]

거동은 편치 않지만, 또박또박 자신의 이야기를 해 나가는데요.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나이.) 90이 넘었지, 93세인가."]

정전협정을 한 달여 앞둔 1953년 6월 28일.

강원도 철원의 화살머리고지에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됐다고 합니다.

[이대봉/귀환 국군포로 : "기차에 타라 그러더란 말이야. 기차가 북쪽으로 가더란 말이야. 같이 탄 사람들이 아 이거 북쪽으로 간다고 그러면서 내려놓은 게 아오지라는, 함경북도 아오지라는데 가서..."]

이후, 북한 아오지 탄광에서 53년간 강제 노동에 동원됐는데요.

국군포로는 요주의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이대봉/귀환 국군포로 : "내가 국군포로니까 감시 속에서 살았단 말이요. 여기서 말하면 안전부인가 내가 밤새 감시 받으면서 살았어."]

열악한 탄광에서 노동의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손은 어떻게 다치셨어요?) 탄광에서 일하다가 다쳤다고. (기계에 끼인 거예요?) 기계에 이렇게 (손이) 끼었어."]

이대봉 할아버지는 2006년 탄광 사고로 외아들을 잃고, 탈북할 결심을 합니다.

[이대봉/귀환 국군포로 : "(탄광에서 일하실 때 누가 제일 보고 싶으셨어요?) 탄광 일할 때 고향 생각이 나지, 부모 생각."]

천신만고 끝에 고향 진주에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대봉/귀환 국군포로 : "(다시 한국에 오셔서 어머니 찾으셨어요?) 어머니 사망하고 없지. (산소에 가서) 내가 이제 돌아왔다고 그랬지."]

22살 청년이 백발노인이 되어 어머니를 찾아가고, 전역식을 치르기까지 5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북에 남겨져 마지막까지 고향과 조국을 그리워했을 이들을 떠올립니다.

["(탄광에 같이 계셨던 분들인 거예요?) 탄광에서 같이 일했으니까 다른 사람보다도 친했지."]

북쪽에서 모진 세월을 살아왔지만, 나라를 지킨 영광을 안고 살아가는 국군포로들.

["(건강하셔야 돼요.) 네, 고맙소."]

흘러가는 시간과 사투를 벌이는 그들을, 이제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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