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동영상 분석…인공지능은 최고의 동료이자 최악의 적
[편집자주] 과학동아는 1월호부터 대검찰청 과학수사부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수사기술 연구를 가상사건을 통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 사건파일#6 옹고집전
옹고집 씨는 심술궂고 사악하기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 놀이터에서 잘 놀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십중팔구 옹 씨가 괴롭힌 탓이다. 집 앞에 배송된 택배가 사라진다? 옹씨다. 지역 경찰관 중에서 옹 씨를 만난 적 없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SNS에 옹 씨가 길고양이를 잔인하게 죽이는 영상이 퍼졌다. 옹씨는 동물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으나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내가 썩을 놈이긴 해도 죄 없는 동물을 해칠 정도는 아니라고!"
영상엔 옹 씨의 얼굴이 선명히 나와 있다. 옹 씨와 영상,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2021년 12월 음주 운전 뺑소니 사건이 검찰에 송치됐다. 피고인과 함께 술을 마신 A와 B는 피고인이 음주 운전을 했다고 증언했지만 피고인은 혐의를 부인하는 상황. 담당 검사는 대검찰청 과학수사부를 찾았다. 증거로 제출된 폐쇄회로(CC)TV 영상 속 운전자와 현장에서 경찰이 보디캠으로 촬영한 피고인이 같은 인물인지 분석하기 위해서다.
지난 5월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영상분석실을 찾아 수사 뒷 이야기를 들었다. 이 사건의 영상 분석을 담당한 박민우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영상분석실 감정관은 "사건이 접수된 지 약 일주일 뒤에 바로 재판이 진행됐던 급박한 상황"이라면서 "결국 피고인은 억울하게 누명을 썼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회상했다.
영상분석은 증거로 제출된 범죄 현장의 CCTV나 블랙박스 등을 과학적인 분석 기법을 통해 분석하는 일이다. 그 결과 얻을 수 있는 자료나 증거 등을 통해 사건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영상분석실에선 사진 속 인물이 동일인인지 식별하고 특정 물체가 인물의 키를 알아내거나 사진 또는 영상이 위·변조됐는지 확인하는 등 다양한 감정 업무가 이뤄진다.
박 감정관은 "영상을 통해서는 피고인의 얼굴을 식별하기 어려워 착용한 옷을 기준으로 분석했다"고 설명했다. 우선 보디캠으로 촬영한 영상의 화질과 색감을 개선해 피고인과 인물 A, B의 복장을 자세히 살펴봤다.
피고인은 보라색 상의 위에 검은색 외투, 그리고 짙은 카키색 또는 회색으로 보이는 하의를 입고 있었다. 한편 CCTV 영상에는 회색 상의에 검은색 외투, 그리고 밝은색 하의를 입은 인물이 운전석에서 내리는 모습이 포착됐다.
"영상에 나타나는 색이 실제로는 어떤 색인지 분석하는 프로그램을 활용해 영상 속 인물이 착용한 옷의 색을 보다 자세히 분석할 수 있었죠. 그 결과 실제 음주 운전을 한 사람은 피고인이 아닌 인물 B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보디캠으로 촬영한 영상에 인물 B가 회색 상의에 검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는 특징이 관찰됐거든요."
새롭게 얻은 증거를 활용해 추가 수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A와 B가 피고인에게 죄를 덮어씌운 정황이 포착됐다. 자칫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쓸 뻔했던 피고인은 무죄를 구형받았다. 박 감정관은 "피고인의 누명이 벗겨진 날 담당 검사가 전화해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며 "수천 수백 건의 사건을 맡지만 이렇게 누명을 벗겨낼 수 있었던 사건이나 숨겨진 죄를 밝혔을 때 특히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감정 결과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매번 알 수는 없거든요. 결과가 실제로 법정에서 도움이 된다는 말을 전해주시면 감사하더라고요."
● 박민우 감정관의 영상분석 뒷이야기
박민우 감정관은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거나 숨은 범죄를 증명하는 일에서 보람을 찾는다"고 말한다.
"한국 영해에 들어온 해외 선박을 감시하려고 해경이 헬기를 타고 출동했는데 선박에서 해수포를 쏜 겁니다. 원래 영상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장면이었는데 이미지 개선을 통해 해수포를 쏜 사실이 명확히 나타나 법정 판결을 뒤집을 수 있었죠."
● AI, 영상분석의 '변곡점' 되다
"딥페이크네요. 옹고집 씨가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보이게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얼굴을 교묘하게 합성한 거예요. AI로 만든 영상을 판별하는 프로그램을 방금 돌려봤는데 이 영상이 AI를 활용해 만들었다는 몇 가지 증거가 포착됐어요."
억울하게 누명을 쓸 뻔했던 옹고집 씨 입장에선 잘된 일이다. 그런데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영상분석실 감정관은 수화기 너머에서 한숨을 쉬었다. "얼마 전까진 AI를 영상분석을 도와주는 유용한 도구로만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선 어째 AI를 이용해서 범죄를 저지른 사례를 더 많이 보네요." AI가 최고의 동료이자 최악의 적이 된 셈이다.
박 감정관이 영상분석 기술을 이용해 피고인의 누명을 벗겨준 것처럼 과학기술을 활용해 범죄를 수사하고 증거를 찾아내는 분야를 통틀어 법과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중요한 수사 도구인 과학기술이 거꾸로 범죄를 저지르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 "AI 열풍은 영상분석 분야의 중요한 변곡점이 됐다"는 게 윤성빈 영상분석실장의 설명이다.
AI는 유용한 도구다. 영상분석실에서 2021년 개발한 영상 속 자동차의 번호판을 인식하는 AI 기술이 대표적 사례다. 비오는 날, 흐린 날, 밝은 날 등 다양한 환경에서 자동차의 번호판을 촬영한 다음 이 데이터를 AI에게 학습시킨다. 그러면 AI가 촬영된 번호판 속 숫자를 인식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처럼 AI에 데이터를 학습시켜 숫자나 그림 등을 인식하도록 가르치는 기법을 딥러닝이라고 한다. 딥러닝을 통해 '번호판 읽는 법'을 배운 AI는 사람의 눈으로도 쉽게 구별하지 못하는 숫자까지도 읽을 수 있다. 이외에도 AI는 영상의 프레임을 각각 분석해 유의미한 정보를 추출하거나 영상 또는 사진의 화질을 높이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한다.
그러나 AI를 악용한 범죄도 있다. AI를 이용한 이미지 합성기술, 딥페이크를 이용해 유명 인사의 얼굴을 다른 사람의 몸에 합성해 실제 하지 않은 일도 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명예 훼손 사건이 빈번하다.
윤 실장은 "딥페이크 탐지를 할 수 있는 첨단 장비 도입과 함께 딥페이크 탐지 기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AI를 이용해 위·변조한 영상이나 사진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이미지가 기하학적으로 왜곡되거나 합성 과정에서 부자연스러운 데이터 압축 흔적이 남는 식이다. 이런 흔적을 찾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수사자 료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영상분석실의 목표다.
해마다 종류가 다양해지는 신종 마약부터 AI와 같은 기술을 악용한 딥페이크까지. 당신이 이 기사를 읽는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새로운 범죄가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윤 실장을 비롯해 기자가 반년간 '대검찰청 과학수사노트' 연재로 만난 대검찰청 과학수사부의 연구자들은 "항상 한 발짝 뒤에서 범죄를 뒤쫓는 것이 수사기관의 숙명"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서울 한복판 대검찰청의 회색 건물 안에선 범죄와 과학수사부 연구자들의 치열한 전투가 일상이다. 범죄가 있는 한 이들의 전투는 끝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들이 싸우고 있다는 건 진실이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다는 뜻이 되겠다.
● 끝나지 않는 전투, 과학수사
윤성빈 영상분석실장은 "영상 감정에는 영상복원 프로그램이나 인공지능 같은 기술뿐 아니라 감정관의 역량도 함께 조합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보이지 않는 영상이나 이미지 속에서 정보를 찾아내는 노하우는 협업이다. 윤 실장은 "전공이 다른 감정관들끼리 서로 필요한 부분을 유기적으로 도와가며 감정 업무를 수행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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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기자 leci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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