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지 않았다?
'발명가' 하면 생각나는 그 사람, 바로 미국의 토머스 에디슨이다. 그의 발명품으로 알려진 수많은 물건들과 괴짜같은 일화는 에디슨을 '고독한 괴짜 천재 발명가'로 각인시켰다. 그는 진짜 그런 사람이었을까. 에디슨의 발명 뒤에 숨겨진 일화를 분석해본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사물을 하나 꼽으라면 그건 단연 백열전구일 것이다.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린 만화 캐릭터를 생각해 보자. 그 머리 위에는 전구가 켜져 있다. '전구=아이디어'라는 특수한 대응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배경엔 전구의 발명자로 알려진 토머스 에디슨이 있다.
에디슨의 전기(傳記)에서 독자를 사로잡는 이야기는 그의 어릴 적 일화들이다. 학교를 중퇴하고, 닭을 부화시키기 위해 달걀을 품고, 친구를 공중에 띄우려고 화학 물질을 먹인 일화들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문제아 취급을 받던 아이가 커서 전구를 발명했다는 이야기는 에디슨이 주변과 잘 어울리지 못한 천재였다는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에디슨은 정말 사회와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당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창조적 발상을 구현해 낸 괴짜 발명가였을까.
에디슨의 유년기 일화 중 비교적 덜 알려진 사례가 있다. 에디슨이 열두 살 때 마을에 기차가 들어오자 그는 기차에서 다과를 팔아 돈을 벌기로 마음먹었다. 여러 열차역을 정차하던 중 에디슨은 지역마다 농산물의 가격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차가 잠깐 정차했을 때 그 지역에서 싸게 파는 농산물을 사 다른 역에서 파는 사업을 구상했다.
에디슨은 자신보다 어린아이들까지 고용해 규모를 키웠고 몇 년 후 열차에 화학 실험실을 마련하는 데 성공할 정도로 상당한 돈을 벌었다. 그러나 어 날 실험실에서 불이 나는 사고가 발생했고 결국 에디슨은 차장에게 따귀를 맞고 쫓겨났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기차에 실험실을 설치하고 기어이 불을 내고 마는 꼬마 괴짜 이전에 기차를 활용해 농산물 유통 사업에 성공한 꼬마 사업가가 있었다는 점이다.
에디슨의 사업가적 기질은 그가 전등 사업에 뛰어든 과정에서도 잘 나타난다. 알려진 바와 달리 에디슨은 전구라는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떠올린 사람도 전구를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도 아니다. 19세기 초 도선에 전류를 통과시킬 때 빛을 내는 현상이 과학계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조명 장치의 개발에 뛰어들었다.
에디슨 이전에 20여 명의 과학자들이 필라멘트를 이용한 전구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고 일부는 특허를 얻었다. 이 중에서도 영국의 화학자 조지프 스완은 수명이 비교적 긴 실용적인 전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자신의 작업이 이전에 비해 크게 새로운 것이 없다고 본 스완은 곧바로 특허를 출원하지 않았다가 나중에야 출원했다.
에디슨은 이런 전구들을 활용한 조명 사업을 구상했다. 특히 영국에서 스완과의 특허권 분쟁을 우려했던 에디슨은 스완과 합작회사를 차려 '에디스완'이라는 상표명으로 사업을 벌였다. 어렸을 적 기차로 사업을 벌였던 것처럼 에디슨은 이미 개발된 전구를 이용해 전등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에디슨은 비록 전구를 처음 발명하지 않았지만 상용화할 수있는 전구를 직접 연구하면서 전구를 뛰어난 조명 기술로 만드는 데에는 크게 기여했다. 뒤집어 말하면 전구는 당시 다른 조명 기술을 대체할 만한 뛰어난 기술이 아니었다.
오늘날 일상에서 전기 제품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전기 콘센트, 송전선, 발전소를 포함한 전기 시스템 전체가 잘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디슨이 전등 사업에 뛰어든 1870년대에는 이 모든 것들이 없었다.
이는 당시 기반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던 가스등과 큰 차이가 있었다. 가스등은 중앙에서 각 집으로 촘촘히 연결된 가스 공급망 덕분에 저렴한 비용으로 실내를 밝힐 수 있었다.
에디슨은 전구를 사업화하기 위해 전구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을 제작해야 했다. 에디슨은 동료들과 함께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기, 생산된 전기를 배분하는 배전기, 전기가 전달되는 송전선, 과전류를 막기 위한 퓨즈, 전력량을 측정하는 계량기, 전구를 끼울 소켓, 더 오래가고 안정적인 전구 등 전기시스템의 구성 요소들을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 200개가 넘는 특허를 출원했다. 전기 시스템의 구축을 위해 에디슨 전등회사, 에디슨 기계회사, 에디슨 전기튜브회사, 에디슨 전구회사 등과 같은 여러 제조사를 설립했고 이들은 '제너럴 일렉트릭(GE)'이라는 회사로 최근까지 이어졌다.
기술적으로 전기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만으로는 전구 사업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에디슨은 자신의 발명을 홍보할 수 있는 언론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송전선 설치 허가를 받기 위해 시 의원들에게 정치적 로비도 벌였다.
또한 대중이 전구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갖도록 홍보했다. 에디슨 전등회사는 1920년대 제작한 홍보 그림에서 집 밖으로 뻗어 나가는 밝은 불빛이 환대를 상징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전구가 창의적 발상을 상징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전까지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등장인물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는 머리 위에 물음표나 차를 끼얹는 주전자가 떠 있곤 했다.
이런 물건들은 차차 전구로 대체됐다.전구가 뛰어난 조명 기술로 사회에 수용되기 위해선 전구라는 기술을 광범위하게 작동시킬 수 있는 전기 시스템 구축과 문화적 동원이 수반돼야 했다. 따지고 보면 에디슨은 전구를 제외한 전기 시스템 전체를 발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디슨이 학교를 중퇴했다는 일화는 제도권 교육에 저항하고 세상과 거리를 두는 낭만적인 발명가의 이미지를 강화한다. 그러나 에디슨은 외로운 발명가가 아니었다. 그의 이름으로 출원된 발명품의 대부분은 에디슨이 29세가 되던 해 미국 뉴저지주에 설립한 '멘로 파크 연구소'에서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에디슨은 발명 활동을 함께하던 동료들을 포함해 물리학자, 화학자, 기계공들을 고용해 전문 연구팀을 구성했다. 독학가였던 에디슨은 과학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부족했지만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물리학자를 비롯해 과학자 여럿을 고용해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했다.
멘로 파크 연구소는 최신 과학기술계 학술지를 비치하고 공작 기계와 화학 실험 설비를 마련하는 등 체계적으로 제품을 만드는 공장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실제로 에디슨이 멘로 파크 연구소를 “발명 공장”이라 불렀던 것처럼 축음기, 전구와 관련된 수많은 발명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발명 공장의 중요성은 이 연구소가 다수의 발명품을 만들어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멘로 파크 연구소는 단순히 한 개인의 창의적인 발상으로부터 발명이나 혁신을 기대할 수없다는 그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멘로 파크 연구소에 고용된 과학자들이 학술지를 통해 습득한 최신의 이론과 실험 결과들을 적용하고 기술자들이 기계공작소에서 부품을 정교히 제작함으로써 에디슨의 이름으로 1000개가 넘는 특허를 출원할 수 있었다.
경영 전략의 차원에서 에디슨 개인이 수많은 발명을 한 것처럼 포장한 것일 뿐 그는 발명을 하기 위해 정규 교육을 받은 전문가 집단과 고도의 설비들이 필수적이라고 봤다. 공동 작업의 결과를 에디슨 개인의 특허로 귀속시킴으로써 연구소는 에디슨의 명성을 이용해 대외적으로 투자금을 확보하고 연구소에서 발명한 기술이 사회에 더욱 잘 수용되도록 유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디슨에게 있어서 발명은 개인이 아닌 조직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었다. 전등 사업에 성공한 에디슨은 멘로 파크 연구소보다 더 큰 규모의 '웨스트오렌지 연구소'를 설립했다. 에디슨의 연구소 설립 사례는 이후 GE, 듀퐁 등의 대기업 연구소와 미 해군연구소 등 많은 민간 및 공공 분야 연구소들의 모태가 됐다.
오늘날 몇몇 기업가들이 괴짜 같은 모습으로 창조적인 혁신가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에디슨의 사례처럼 이들이 차용한 혁신가의 이미지 역시 뛰어난 사업 수완의 한 측면으로 이해해야 한다. 에디슨의 생애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기술 혁신과 발명의 요인을 '개인의 영감'이라는 모호한 개념에 국한하는 함정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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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아 6월호, [과학사 극장]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지 않았다?
[이창욱 기자 changwoo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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