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바꿔도 원망은 없었네 [주말을 여는 시]

하린 시인 2024. 6. 29.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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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오은 시인의 ‘나무의 일’
태어나고 모습이 바뀌는 운명
나무가 겪는 생의 직관적 파악
담백하게 느껴지는 씁쓸한 감정

나무의 일

나무가 책상이 되는 일
잘리고 구멍이 뚫리고 못이 박히고
낯선 부위와 마주하는 일
모서리를 갖는 일

나무가 침대가 되는 일
나를 지우면서 너를 드러내는 일
나를 비우면서 너를 채우는 일
부피를 갖는 일

나무가 합판이 되는 일
나무가 종이가 되는 일
점점 얇아지는 일

나무가 연필이 되는 일
더 날카로워지는 일

종이가 된 나무가
연필이 된 나무와 만나는 일
밤새 사각거리는 일

종이가 된 나무와
연필이 된 나무가
책상이 된 나무와 만나는 일
한 몸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다음 날이 되는 일
나무가 문이 되는 일
그림자가 드나들 수 있게
기꺼이 열리는 일
내일을 보고 싶지 않아
굳게 닫히는 일
빗소리를 그리워하는 일

나무가 계단이 되는 일
흙에 덮이는 일
비에 젖는 일
사이를 만들어

발판이 되는 일

나무가 우산이 되는 일
펼 때부터 접힐 때까지
흔들리는 일

오은
· 2002년 현대시 데뷔
· 시집 「나는 이름이 있었다」 등 다수
· 구상시문학상 등 다수

「왼손은 마음이 아파」, 현대문학, 2018.

나무는 인간에 의해 구멍이 나거나 얇아지거나 변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사진=펙셀]

당신은 나무와 어떤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가. 인간의 모든 생로병사 속에는 언제나 나무가 있었다. 태어난 후와 죽음 후에 작성하는 출생신고서와 사망신고서만 봐도 우리의 삶이 얼마나 나무와 밀착해 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문명과 문화의 중심엔 언제나 나무가 있었다. 집, 가구, 책만 떠올려도 우리는 그것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그럴 때 나무는 늘 수동적이고 희생적이었다. 무언가를 바라지도 않고 인간이 하는 대로 항상 자신을 내줬다. 인간이 나무를 변형해서 '종이' '가구' '목재' '침대' '발판' '집' '관' 등으로 용도나 이름을 바꿔도 원망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기 자신, 이를테면 '나무'를 실천할 뿐이었다.

그런 나무의 생을 직관적으로 파악해서 잘 표현한 시가 오은 시인의 '나무의 일'이다. 나무는 "잘리고 구멍이 뚫리고 못이 박히고/낯선 부위와 마주"하기도 하고, "모서리를 갖고", 얇아지고, 더 날카로워지기도 한다.

화자는 그런 나무의 속성을 말할 때 절대 과장하거나 축소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언술한다. 나무를 상징적으로, 암시적으로, 비유적으로 말하지 않고, 화자와 동일화도 꾀하지 않고, 그저 '나무의 일'에 푹 젖어 나무의 본질과 핵심을 무덤덤하게 언술한다. 그것으로 인해 독자는 오히려 '나무의 일'을 객관적으로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한다.

시에서 나무는 변용과 쓸모를 여러 차례 갖는다. 책상, 침대, 합판, 종이, 연필, 문, 계단, 우산으로 변하는 상황이 그것인데, 그 모든 것이 나무의 의지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갖는 이기를 통해 이뤄진다. 그런데 시인은 사람들의 그런 행동을 비판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생을 살다가는 타자도 있다'라는 식의 관조적 태도로 나무를 바라보고 읽어낸다.

그럼에도 시를 다 읽고 나면 왠지 씁쓸한 감정이 밀려온다. 자신(나)을 지우면서 인간(너)을 드러내는 나무, 나(나무)를 비우면서 너(인간)를 채우던 희생적인 나무의 생이 담백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사진=펙셀]

그리하여 "종이가 된 나무와/연필이 된 나무가/책상이 된 나무와 만나는 일/한 몸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며/다음 날이 되는 일"과 "내일을 보고 싶지 않아/굳게 닫히는 일", "빗소리를 그리워하는 일" 같은 구절을 읽으면 나무의 소박한 주체성이 연민의 정서로 다가온다.

이 시를 읽은 독자는 이제 생활에서 만나는 나무와 나무로 만든 사물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나무가 자라서 '우산'처럼 펼쳐진 후 죽을 때까지(접힐 때까지) 저 혼자 몰래 흔들리고 있는 장면이 계속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poeth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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