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외국어…붙어야 하는 시험, 따야 하는 자격증 없지만 [ESC]
일본 여행하다, 남미 탐험 위해…제2외국어 입문한 만학도들
사이버대 등록해 ‘열공’, 학우들과 대면모임 하며 ‘공부 자극’
“암기력 떨어져도 지구력으로…단어 너머 세상 보이기 시작”
“혹시 그런 느낌 아세요? 유산지 있잖아요. 물이 흡수가 안 되는 기름 먹인 종이. 그걸 누가 내 뇌 위에 덮어놓은 것 같은 느낌 말이에요. 제가 처음 중국어를 배울 때 사실 그랬어요. 매일 새로운 단어들이 흘러들어오기는 하는데, 절대 뇌 속으로 흡수는 안 되는….”
50살 넘어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던 김지원(가명·63)씨는 12년 전 어학 병아리 시기를 회상하면 지금도 큭큭 웃음이 나온다. 주부였던 그는 남편이 주재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2012년 중국 톈진으로 이주했다. 당시 지원씨가 할 줄 알던 중국어는 ‘안녕하세요’라는 뜻의 ‘니하오’ 달랑 하나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직장을 그만둔 지도 오래됐고, 외국어 배우기엔 나이도 많았던 때였어요. 간단히 배워보자고 시작했는데 그게 ‘사서 고생길’의 시작이 될 줄은 몰랐죠.”(웃음)
적어도 시장에 가서 바가지 쓰는 일은 면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중국어 공부였다. 그러나 지원씨는 리듬과 운율이 빼어난 이 언어와 사랑에 빠졌다. 2017년 한국에 돌아와서도 온라인으로 중국어 공부를 계속했다. 물론 아직도 그의 혀는 몇몇 중국어 발음을 엉터리로 낸다. 그러나 멈춤은 없다. 지난 19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지원씨는 최근에는 영화 대사들로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부하고 영화를 다시 보니 영화 속 모든 장면이 뿌옇던 장막이 벗겨지는 듯 훨씬 선명해지는 것 같았어요. 나이 들어 배움이 느려도 공부를 포기할 수 없는 건 이렇게 잊기 힘든 순간들 때문인 것 같아요.”
“졸업까지 10년 정도 넉넉히”
인생 2막을 새로운 외국어와 함께 열어가는 이들이 있다. ‘해야 돼서’가 아니라 ‘하고 싶으니까’ 낯선 언어의 세계에 부딪쳐보기로 한 만학도들이다. 금전적·시간적 부담이 적은 온라인 교육을 이용하는 이들이 많다. 사이버대학교 중 ‘외국어 특성화’를 내세우고 있는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이하 사이버외대)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신입생들의 평균 연령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점차 고령화되어가는 이유도 있겠지만, 인생 후반부에 배우고 싶었던 언어에 대한 꿈에 잊지 않고 도전하는 이들도 늘고 있기 때문이다.
어학 취미는 일견 우아해 보인다. 그러나 중년의 새 도전은 녹록하지 않다. 나이가 들면 언어를 만들어내고 표현하는 이른바 언어 산출 능력이 감퇴한다. 단어에 대한 기본적 지식은 유지되지만, 단어 정보를 꺼내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아는 단어인데 입안에서 맴돌면서 나오지 않는 경험이 늘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유명 작가 윌리엄 알렉산더는 2017년 ‘나이 들어 외국어라니’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58살에 프랑스어 배우기를 시작한 자신을 매일 비탈길로 굴러 내려오는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와 닮았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지난해 사이버외대 일본어학부에 입학한 한정희(64)씨 역시 늦깎이 어학 공부의 가장 큰 애로 사항으로 감퇴된 암기력을 꼽는다. “암기력과 이해력이 이전보다 못한 것은 사실이에요. 반면 끝까지 해내는 지구력은 커진 것 같아요. 다만 속도가 더딘 것은 사실이라 졸업까지는 10년 정도로 넉넉하게 잡고 있어요.” 39년간 섰던 초등학교 교단을 2년 전에 떠난 정희씨는 붙어야 하는 시험도 따야 하는 자격증도 없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이다. 암기력 보완을 위해 정해놓은 공부 구간을 몇번이고 반복하는 ‘다람쥐 쳇바퀴 공부법’도 스스로 만들었다. 공부가 주는 긴장과 스트레스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삶의 활력이 됐다. 그리고 일본어로 성경을 읽는 첫 목표를 달성했다. “공부를 하면서 안 보이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 게 너무나 행복했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지구력이 필요한 중년의 어학 공부 과정에선 같은 뜻을 가진 ‘학우’들과 함께하는 활동이 중요한 자극제가 된다. 사이버외대 일본어학부장인 윤호숙 교수는 “예전에 견줘 중장년층 학생들이 학부 임원을 맡거나 학우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경우가 늘었고 학교에서 준비한 어학연수나 문화탐방 등 행사 참여율도 매우 높다”고 전했다. 올해 8월 사이버외대 일본어학부 졸업을 앞둔 이철규(58)씨도 꾸준히 외국어 공부를 이어가는 비결로 ‘학우들과 함께하는 적극적인 참여’를 꼽는다. 그는 일본어 공부를 업무상 필요로 시작하긴 했다.
일본 기업과의 교류가 많아서 2017년 산업체 위탁 과정으로 공부를 시작한 철규씨는 처음 1년 동안은 방황했다. 퇴근한 뒤 노트북으로 수업을 켜놓은 채 잠든 날도 많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학교에 상담을 신청했고, 대면 모임과 문화탐방 등 다양한 활동이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일본어로 민들레라는 뜻을 가진 ‘단포포’라는 동아리를 만들어서 학우들과 다양한 추억도 쌓고 공부도 함께 했다. 그렇게 생긴 열정으로 일본어 연설 대회에 참가해 대상과 최우수상을 받았다. 철규씨는 “(이렇게 공부한) 지난 7년간 정말 행복했다”고 말했다. 철규씨는 공부하면서 역사적 앙금이 남은 나라인 일본을 바라보는 눈도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1년간 교환학생 경험 등을 통해 일본인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껄끄러운 관계 정도의 추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으로 다가오는 체험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는 “꽉 막힌 벽에 새로운 창을 내 이전에는 보지 못한 풍경을 보는 느낌이었다”며 “일본어를 배우기 전과 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은퇴 뒤 버킷리스트 위해서
사이버외대 쪽은 최근 일본어학부와 스페인어학부에 40~50대 중년 입학생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홍승표(53)씨는 사이버외대 스페인어학부에 입학하면서 두번째 제2외국어 공부에 도전했다. 2019년 일본어학부를 입학해 지난해 졸업한 그는 지난해 가을 학기에 다시 스페인어학부 신입생이 됐다. 은퇴 뒤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남미 탐험’을 위해서다.
“남미는 비교적 자연환경도 잘 보존돼 있고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지역 중 하나잖아요? 예전부터 이 지역을 탐험하고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본어를 공부하는 동안 한국어교원 자격 과정도 복수전공했습니다. 자격증이 있으면 몇몇 기관을 통해 국외에서 자원봉사 등도 할 수 있다고 해요.”
회사원인 그가 어학 공부를 특별히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지리적으로 가까워 자주 가던 일본에 대해 더 알아보고자 시작한 어학 공부였지만 단순히 단어나 문법을 배우는 것 너머의 만족감을 주었다. 문화와 역사도 함께 배워가며 성장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도 그렇지만 나이 들어 어학에 도전하는 분들은 젊은 시절 열심히 일하며 살았으니 나이 들어서는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새 언어를 배우는 게 아닌가 싶어요. 스페인어 같은 경우는 문화나 지역에 대한 동경도 한몫하고요. 지난가을 학교에서 스페인 문화탐방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이미 산티아고 순례길을 12번이나 다녀오신 분도 있더라고요.”
실제 사이버외대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입학 동기에서 ‘지적 호기심 충족을 포함한 자기계발’이 32.2%를 차지했다. 윤 교수는 중장년층이 제2외국어를 배우는 동기에 대해 “영어처럼 입시나 승진 시험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 자기가 평소에 관심 있었던 국가나 문화에 대해 더 배우고 싶다는 마음으로 등록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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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번역가 된 일본인 만학도
중년 외국인에게도 한국어는 ‘배우고 싶은 외국어’다. 일본 도쿄에 사는 다키자와 오리에(62)와 모치다 게이코(65)도 지구력에는 뒤지지 않는 한국어 만학도들이다. 오리에는 40대 중반에 드라마에 입문하며 가볍게 시작한 한국어 공부가 올해로 17년차에 접어든다. 수준별 목표를 정해 꾸준히 실력을 쌓았다.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지 4~5년 정도 됐을 때 한국문학번역원이 주는 ‘번역 신인상’ 수상을 목표로 잡았다. 한국 소설 독서모임에 활발히 참여했고 2016년엔 사이버외대에 입학했다. 전공은 일본어. 한국의 사이버대에서 일본어를 배우는 건 한국어 번역을 더 잘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지난 10일 일본 도쿄역 인근 카페에서 오리에와 게이코를 만났다. 오리에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문학 수업도 들을 수 있었고, 한국의 일본어학부 학생들과 온라인 동아리 모임까지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고 했다. 2020년 사이버대학을 졸업한 오리에는 최근 한국 책 ‘녹차 탐미’의 일본어판 번역을 맡으면서 번역가로 데뷔했다. 일본에서 한국 책을 널리 알리며 인지도가 높아진 쿠온 출판사의 김승복 대표와 한국 소설 독서모임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됐다.
특수학교 교사를 하다 은퇴한 게이코는 2009년 소록도 병원 자원봉사가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자신을 환대하던 마을 주민들을 만나면서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꾸준히 공부를 이어갔고 한국어능력시험 최고 등급인 6등급과 통역안내사 자격증을 땄다. 2018년부터 사이버외대에서 일본어학부와 한국어학부를 함께 수강하고 있는 그는 오리에처럼 번역상 응모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어 공부가 재밌었기 때문에 오래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외국어를 구사하는 일은 매력적인 능력이지만 불쑥 학습을 위해 달려들 결심을 하기란 쉽지 않다. 윤 교수는 “특히 나이가 들면 힘들지만 꾸준히 하면 안 되는 건 없다”며 “어느 순간 툭 하고 한 단계 높이 올라가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어 공부를 시시포스의 형벌에 비유했던 작가 윌리엄은 책의 말미에는 외국어 공부 전후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에 찍힌 자신의 뇌 변화 사진과 놀랍도록 상승한 인지능력시험 결과를 첨부했다. 새로운 도전이 빚어내는 놀라운 변화를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서였다. 실수와 민망함으로 가득했던 외국어 학습 경험을 그는 이렇게 돌아봤다. “아직 원하는 만큼 프랑스어를 익히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내 인생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워졌다. 지난 몇년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깨달은 교훈 중 이게 가장 중요하다.”
윤은숙 라이프콘텐츠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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