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지금 읽어도 이해된 1909년 '걸리버유람기' 신선 충격"[조수원 BOOK북적]

조수원 기자 2024. 6. 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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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서울국제도서전 '후이늠' 주제
2024년판 '걸리버 여행기' 출간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김연수 소설가가 지난 26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2024 서울국제도서전' 주제인 '후이늠' 강연을 하고 있다.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 슬로건인 ‘후이늠’은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가 마지막으로 여행한 장소이다. 2024.06.28. pak7130@newsis.com

[서울=뉴시스]조수원 기자 = "제의를 받았을 때 처음엔 거절할 생각으로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걸리버 여행기'를 낸 소설가 김연수가 엉뚱한 말로 운을 뗐다. 2024 서울도서전 개막 첫날 주제 강연 '후이늠'을 진행한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건 1909년에 쓴 육당 최남선의 '걸리버유람기' 글 때문이었다"고 했다.
"한 백 년 전에 뿌리탠 나라에 걸리버라는, 배 타고 다니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소. 배 타고 다니는 것은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고생이라면 고생이로되 익숙해지김나 하면 아무렇지도 아니할뿐더러 여기저기로 왕래하면서 어려움도 겪고 구경도 하면서 넓으나 넓은 바다에 노는 고래와 물에 잠긴 악어와 더불어 벗 삼아 사나이의 좁은 기상을 넓히는 것 또한 아주 재미가 있소."(10쪽)
그는 이날 책에 삽입된 그림을 그린 강혜숙 작가와 함께 걸리버여행기를 써낸 이야기를 풀어냈다.

김연수는 "최남선의 작품을 읽으면서 당대 언어를 지금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고 했다.

"최남선 원작은 눈으로 보면 읽기 어려운데 하나하나 따라 읽을 수 있는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1909년 독자들과 지금 우리가 소통할 수 있구나, 말이 안 바뀌었구나…나름대로 (책을) 소화해 봐야겠다 싶었죠."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강혜숙(왼쪽부터) 그림책 작가, 김연수 소설가, 조연주 레제 출판사 대표가 지난 26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2024 서울국제도서전' 주제인 '후이늠' 강연을 하고 있다.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 슬로건인 ‘후이늠’은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가 마지막으로 여행한 장소이다. 2024.06.28. pak7130@newsis.com

김연수는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 주제 '후이늠'을 기념해 1726년작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리메이크 했다. 18세기 당시 영국 사회를 풍자한 '걸리버 여행기'는 일찍이 번역돼 고전으로 널리 알려져 부담이 컸다.

"워낙 많은 책, 완역본이 나와 있어서 다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원전과는 다른 결말을 냈다"면서 "이번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후이늠'을 주제로 선택한 이유가 들어갈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후이늠’(Houyhnhnm)은 ‘걸리버 여행기’ 4부에 나오는 '말들의 나라'다. 완벽한 이성을 가진 ‘말(馬)’이 사는 나라로 무지, 오만, 욕망, 비참, 전쟁, 다툼 등이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김연수 소설가가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2024 서울국제도서전' 기자감담회에 참석하여 도서전 주제인 걸리버 여행기 속 '후이늠'을 설명하고 있다. 2024.06.28. pak7130@newsis.com


'걸리버 여행기'는 국내에서 주로 아동소설로 분류돼 '소인국' 과 '거인국' 편만 축약된 채 소개되어 왔다. 그러나 원작은 '소인국' 과 '거인국' 편 외에 '하늘을 나는 섬나라' '말의 나라' 등이 포함된 전 4부작으로, 18세기 영국의 정치현실을 신랄하게 꼬집은 성인용 대작이다. 인간성의 기본적 모순인 이성적 억제와 동물적 충동 사이의 대립을 토대로, 자유와 전제국가, 진정한 신앙과 환상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인간의 왜소한 모습을 풍자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1909년 'ㅺㅓㄹ늬버 유람긔'(육당 최남선 번역)라는 제목으로 ‘릴리퍼트’와 ‘브롭딩낵’ 부분만 처음 소개되었다.

21세기 김연수의 '걸리버여행기'는 그 옛 한글의 맛을 살려 개정하고 ‘라퓨타’와 ‘후이늠’ 부분을 추가하여, 해학이 넘치는 삽화를 함께 담아 21세기 한국인의 시각에서 다시 본 '걸리버여행기'다. "최남선이 다시 쓴 문장의 형태를 가능한 한 보존한 채 일부 이해되지 않는 말들, 맞춤법 정도만 바꿨다"고 설명했다.
"어느 날 걸리버가 혼자 소반 위에 있는데 그 알사람이 거기 들어와서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옳다구나 하고 별안간 달려들어 걸리버를 붙잡아 거기 있는 우유통에 밀어넣고는 달아나버렸소. 그렇게 되니 걸리버는 우물에 빠진 생쥐 모양으로 푸우푸 거품을 뿜으면서 헤엄을 치지만 이럭저럭 우유를 많이 마시어 거의거의 우유 속에서 장사 치르게 생겼더니 하늘이 돌봐주시느라 마침 계집아이가 와서 겨우 살아나게 되었소."(57쪽)
김연수는 한국 고전 인물을 등장시켰다. 3장과 4장에서 홍길동이 모습을 드러낸다.
"거기서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큰 배를 타고 잠시 항구에 들른 조선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르빈당'이라고 불렀고, 그 우두머리는 홍길동이라는 자였다. 홍길동은 내게 몇 가지 신기한 재주를 보여줬는데, 그중에는 여러 명의 홍길동으로 분신하는 술법도 있었다."(98~99쪽)
이에 대해 작가는 "3장에서 걸리버는 일본 나가사키를 통해 네덜란드로 귀국하는데 그 길에는 홍길동이 활빈당을 이끌고 떠났다는 율도가 있는 곳이었다"며 "한국에서 나온 책이고 도서전에서 나오는데 시대는 다르지만 '홍길동 정도는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걸리버님, 걸리버님. 여기서 죽으면 안 됩니다. 정신을 차리세요." "누구신가요? 아윽, 모자를 쓴 야후로구나. 저리 가라." "저는 야후가 아니라 길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머리에 쓴 이것은 초립이고요. 일전에 우리가 나가사키에서 스치듯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하십니까? 이제 저는 야후 시절을 지났으니 그렇게 낯을 찌푸리며 코를 막으실 필요는 없습니다."(129쪽)

[서울=뉴시스] 걸리버유람기(사진=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2024.06.28.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1699년 영국에서 여행의 첫발을 내디딘 걸리버가 1909년 육당 최남선을 경유해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에 도착하기까지 '걸리버 유람기'의 의미는 무엇일까.

“후이늠은 우리가 지금 처한 모순적인 상황과 비이성적인 일들이 해결된 사회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책을 통해 각자의 후이늠에 대해 생각해보고 토론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래서 '후이늠'을 현대에서 구현하기 위한 바람으로 언어 장벽을 없애는 AI에 집중했다.

"언어적 한계가 있으니까 300년 전 스위프트의 '걸리버여행기'가 200년 지나서 대한제국에 번역돼 왔어요. 언어적 장벽이 있는 한 언어적 자유, 소통의 자유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행지에 가면 저는 제일 먼저 그 지역의 말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라는 것이 있어 서로의 말을 배울 필요가 없어졌네요." "그다음 사회에서는 언어 자체가 사라지지요." "아아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야후가 후이늠이 된다는 뜻이니까요." "언어가 사라지고 나면 많은 것들이 사라집니다. 제일 먼저 감옥이 사라집니다. 그러고 나면 국가, 정부, 법률, 차별 등도 모두 사라지지요."(133쪽)

☞공감언론 뉴시스 tide1@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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