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밴조王’ 최 리차드, 극성팬들이 호텔방 몰려와…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4. 6. 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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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 속의 모던 경성]하와이 이민 2세…1933년 4개월간 순회연주로 인기 절정
하와이 이민2세 최리차드는 1933년4월 고국을 처음 방문했다. 청중들은 '밴조'라는 미지의 악기를 신출귀몰하게 다루며 '세계적 밴조가'로 불리는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밴조왕'이란 별명을 가진 그는 4개월간 전국을 누비며 순회연주를 할 만큼 선풍적 인기를 누렸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이화여전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박경호(1898~1979)는 폴란드 피아니스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Ignacy Jan Paderewski·1860~1941)를 존경했던 모양이다. 쇼팽 대가이자 바르샤바 음악원장을 지낸 파데레프스키는 1919년 폴란드 초대 대통령을 지낸 저명인사였다. 어느 날 파데레프스키 사진을 액자에 넣어 보관하려고 가게에 갔다. 가게 점원은 사진속 인물이 누구인지 물었다. ‘세계적 음악가’라고 말하자 점원이 대뜸 ‘최 리차드보다 더 잘 하나요?’라고 물었다.(‘나의 실패한 자장가’, 조선일보 1934년9월28일)

최 리차드는 하와이 교포 2세로 1933년 4월 조선에 와서 전국을 순회하며 이름을 날린 밴조(Banjo) 연주자다. 연주력이 뛰어나 ‘밴조왕’이란 별명까지 얻었다고 한다. 그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던지 세간에서 ‘세계적 음악가’로 대접할 만큼 이름을 날렸다.

◇공학도에서 밴조연주가로 변신

조선이 낳은 세계적 빤조家’(조선일보 1933년5월7일) 기사는 최 리차드를 이렇게 소개한다. ‘빤조이스트로 미국에서 이름을 휘날리어 ‘빤조왕’이란 별호를 가진 조선 출신의 최 리차드는 생전에 한번도 보지 못한 고토를 그리워 지난 4일 조선의 땅을 밟게 되었다. 군은 5일 오후5시차로 경성에 도착하야 조선호텔에 투숙하고 있던 중 금 6일 본사를 방문하여 서투른 조선말로 그의 감상을 말하였다.’ 그의 일성은 이랬다. ‘흰 옷을 입고 갓을 쓰고 다니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산수, 거리, 사람, 집 모든 것이 다 말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을 줍니다.’

'밴조왕' 최리차드의 방한을 맞아 그의 특이한 이력을 보도한 조선일보 1933년 5월7일자 기사. 공학도 출신으로 공장 관리자로 재직하다 취미로 시작한 밴조에 빠져 세계적 연주자가 됐다고 소개했다.

◇15분에 650달러 연주료 받아

당시 보도를 정리하면, 최 리차드는 1906년 9월2일 하와이에서 태어난 한인 2세다. (’장유정의 음악정류장’34 ‘밴조의 왕 최리차드’, 조선일보 2022년 9월29일 참조) 아버지 최정호는 강릉 출신으로 1903년 하와이에 이주한 이민 1세대였다. 1933년 당시 아버지는 61세로 소개한 것으로 보아 31세때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최 리차드는 하와이에서 초중등 학교를 마치고 ‘시카고에서 공학을 전공하여 처음에는 공업가로 출세하여 800여명의 직공을 거느리는 대공장의 주임까지 되었’는데 ‘그 여가에 빤조에 취미를 두어 지금은 세계적 빤조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군은 그 첫상(賞)으로 시카고 음악협회에서 2500불 가격이 되는 빤조를 상품으로 받은 것을 위시하여 15분간 연주에 650불의 보수를 받은 최고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국립방송국, 컬럼비아 방송국 기타 각 극장 음악회에 출연한 이 남북 아메리카만 하여도 전후 70회에 달한다고 하는데….’‘(이상 ‘조선이 낳은 세계적 빤조家’, 조선일보 1933년5월7일)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현악기 밴조는 17세기 미국에서 민속음악이나 재즈 연주에 등장했다. 20세기 작곡가 거쉰은 오페라 ‘포기와 베스’, 오케스트라 음악 ‘랩소디 인 블루’엔 밴조를 포함시켰다.

최리차드를 '세계적 빤조家'로 소개한 동아일보 1933년 5월4일자. 이 신문은 최리차드 경성 공회당 독주회를 주최했다.

◇시카고 경연대회 우승한 ‘밴조 킹’

최 리차드는 저명한 밴조 연주자인 해리 레저(Harry Reser)로부터 밴조를 배웠다고 한다. 1930년 시카고 음악 무역센터에서 열린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며 ‘밴조 킹’(Banjo King)이란 별명까지 얻었다.조끼까지 갖춘 양복 정장 차림에 올백으로 빗어넘긴 사진 속 최 리차드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최 리차드는 5월9일 저녁 8시 경성공회당에서 연 고국방문 밴조연주회를 시작으로 4개월간 전국을 순회하며 연주회를 열었다. 동아일보가 경성 연주회를 주최했고, 지방 연주는 각 신문 지국과 사회단체가 나섰다.

◇호텔 방 찾아오는 남녀팬들 줄이어

신문의 열띤 보도 경쟁속에 최 리차드에 쏠린 세간의 관심은 요즘 아이돌스타 못지 않았던 모양이다. ‘군이 머물고 있는 조선호텔로 빤조라는 악기를 좀 보여달라는 성미 조급한 여자가 어제 하루에만 10여명, 사인을 청하러 오는 남자도 상당히 많아 연습으로 인하여 굳게 닫아건 군의 방문을 노크하였다.이렇듯 시정의 인기는 높을 대로 높아져있는데….’(‘그립던 고국에 드리는 천재의 음악예물’, 동아일보 1933년5월9일)

첫 연주 프로그램은 총 27곡으로 꾸렸다. ‘오늘 밤의 연주는 고상한 음악에 비하여 통속적인 재즈를 가미하고 있고, 또 통속적인 듯 하면서도 고상한, 실로 다방면으로 되어있는 곡목이오, 아울러 남북 미주를 1년반동안 순회하면서 가장 환영받고 재청과 3청을 받는 곡목중에서 추리고 추리어 3부에 나누어 전부 27종의 곡목을 연주할 터인데...’(‘미주서 재청삼청받은 27곡목을 추려’,동아일보 1933년5월9일)

최 리차드는 4줄짜리 밴조를 썼는데, 피날레는 가장 유명한 하와이안 송인 ‘알로하 오에’(Aloha Oe)였다.

◇개성, 평양, 진남포, 선천…

최 리차드는 공연 사흘 뒤인 5월 12일 경성을 떠나 기차편으로 북상하면서 개성 평양 진남포 선천 신의주에서 잇따라 연주회를 가졌다. 개성에선 호수돈 학교 피아노 구입 기금 모집 등 모금 연주회의 성격을 겸한 음악회를 잇달아 열었다. 전국 순회 공연도 계속 소개될 만큼,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관심거리였다.

‘하와이 출생으로 세계적 빤조왕이라고 하는 최 리차드군은 구미 각국을 거쳐 중국과 일본 각 중요지를 편답하고 약 2개월전에 고국인 조선에 돌아와 경향각지에서 천재적 묘기를 발휘하고 있던 바, 13일에 목포에서 독주회를 마치고 15일에 당지 상설극장 제국관에서 대성황리에 빤조 독주회를 마치고 16일 낮에는 호남은행 주최로 해(該)은행루상(樓上·건물)에서 지방 다수 유지 참집하에 독주회를 열었다 한다.’(‘세계적 빤조왕 최 리차드 來光’(조선일보 1933년 7월20일)

◇경성방송국서 ‘아리랑’ 연주

최 리차드는 경성방송국에도 출연, 라디오 청취자들에게 연주를 선보였다. 1933년 8월8일 오후8시였다. 모두 6곡을 연주했는데, ‘몽상곡’, ‘세계는 해떠옴을 기다린다’ ‘거짓말’ ‘올드 블랙 조’는 공회당 레퍼토리와 겹친다. 고국 팬들을 위해 새로 연습했는지 ‘아리랑’과 ‘양산도’ 등 민요 두 곡을 보탰다.

◇고아원 분쟁에 휩쓸리기도

순회 연주를 다니다 뜻하지 않은 분쟁에 휩쓸리기도 했다. . 8월 26일 밤 원산관에서 열린 원산고아원 주최 연주회가 그랬다. 주최즉이 개막사를 시작하려던 참에 경영진을 반대하는 측이 고아원을 비난하면서 연설을 막았다. 이어 난투극이 벌어지면서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최 리차드는 귀중한 악기를 보호하기 위해 연주장 밖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 난투극은 고소고발전으로 번져 신문에 오르내렸다. (‘고아원 주최 음악회석의 풍파’, 조선일보 1933년9월10일)

◇하와이서 악기점 운영

1933년 전국 순회 연주 이후 최리차드 소식은 언론에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듬해인 1934년 그가 조선에서 취입한 음반 ‘조선아 잘있거라’가 치안방해라는 이유로 판매금지 당했다는 짤막한 기사(’레코드발매금지’, 동아일보 1934년5월11일)만 나왔을 뿐이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최 리차드가 소개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도 연주활동이나 근황을 찾아보기 어렵다. 1970년대 하와이에서 악기점을 운영했다는 소식 정도다. 1974~1976년 최 리차드가 운영하는 악기점을 찾았다는 글이 온라인에 올라있다. 100년 전 떠들썩하게 이름을 날린 스타이지만, 행적조차 확인할 수 없어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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