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 쇠락한 미국, 군함 건조 비상…K조선 힘 실린다

2024. 6. 29.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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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조선 경연장’ 된 미국

한화오션이 건조한 이지스 구축함인 율곡이이함. 한화오션과 한화시스템은 최근 사상 처음 미국 조선업에 진출했다. [사진 한화그룹]
국내 기업의 사상 첫 미국 조선업 진출이 성사됐다. 한화그룹은 지난 2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필리 조선소(Philly Shipyard) 지분 100%에 대한 인수 계약을 했다. 한화시스템과 한화오션이 참여했고, 인수 금액은 1억 달러(약 1380억원)다. 어성철 한화시스템 대표는 “(주력 수출 시장이던) 중동·동남아·유럽을 넘어 미국까지 수출 영토를 확장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필리 조선소는 노르웨이 기업 아커(Aker)의 미국 소재 자회사로 1997년 미 해군의 필라델피아 국영 조선소 부지에 설립됐다. 이후 미 본토 연안에서 운항하는 대형 상선을 건조해왔고, 미 해사청(MARAD)의 다목적 훈련함 건조나 미 해군 수송함의 유지·보수·정비(MRO) 사업 등을 해왔다.

미, 중·러와 갈등 고조로 군함 수요 증가

미국이 한국 조선업(이하 ‘K조선’)의 새 경연장으로 떠올랐다. 한화그룹이 이번에 물꼬를 트면서 HD한국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 등 다른 기업도 미국 조선업 진출에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관련 업계와 전문가들은 K조선을 매개로 한국의 방산 수출 영토가 미국으로 확장된 데 주목하고 있다. 한화그룹이 인수한 필리 조선소는 미 해군의 발주를 받아 군함을 건조할 자격이 있다. 또 필라델피아 해군 기지와 가까워 군함에 대한 MRO 사업 확대에 유리하다. 변용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미 해군의 전투함 건조와 핵심 전투 체계의 MRO 사업 수주까지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해 국방 예산만 1000조원이 넘어 ‘천조국’으로 불리는 미국인데, 한국이 이런 미국에 군함 등을 수출하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이는 미국이 중국·러시아와의 지정학적 갈등 고조로 군함과 그 MRO에 대한 수요는 증가한 반면, 자국 조선업은 회생하기 힘들 만큼 쇠락한 것과 관련이 깊다. 과거 미국은 1·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항공모함과 원자력 잠수함 등 첨단 군함을 건조, 글로벌 조선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군함에서 쌓은 조선 기술을 상선에서도 발전시키면서 조선업은 전성기를 맞았다. 1920년 자국 조선업 보호와 육성을 위해 제정한 ‘존스 법(Jones Act)’ 역시 단기적으로 도움이 됐다. 미국 내에서 운항·정박하는 모든 선박은 미국에서 건조돼야 한다고 규정한 법이다. 이에 따라 미국 조선소는 글로벌 경쟁 없이 독과점의 선박 건조를 하는 한편 생산능력 확대 대신 설비 투자를 축소, 건조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1960년대를 기점으로 조선 기술을 빠르게 발전시킨 일본에 밀려 80년대까지 글로벌 선박 건조 비중이 점진적으로 낮아졌다. 여기에 80년대 이후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한국과 중국까지 가세하자 조선 시장에서 미국의 입지는 매년 급속도로 좁아졌다. 그사이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자유 경쟁을 중시해 조선업에 대한 보조금을 축소한 것, 계속된 경제 호황에 따른 임금 상승으로 제조업 기반은 쇠퇴한 것도 작용했다. 존스 법의 장기적 부작용도 기름을 부었다. 설비 노후화에도 조선소의 적절한 투자가 없었기 때문에 납기 지연과 건조 비용 증가 등 조선 경쟁력 저하 요인이 늘어났다. 2020년 미국 조선 업체들은 미 해군의 차세대 호위함 건조 사업자 입찰에서 이탈리아 국영 조선소에 밀릴 만큼 뒤처진 상태였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그 결과 지난해 기준 글로벌 선박 수주 점유율이 중국 59%, 한국 23%, 일본 13%인 반면 미국은 0.04%에 그칠 만큼 조선업이 쇠락했다. 결국 중국과 대립 중인 미국 입장에선 취약해진 자국 조선업 역량에 따른 군함 건조 및 MRO 사업 위축을, 주요 동맹국이면서 중국에 대적할 세계 2위의 조선업을 갖춘 한국으로부터 벌충할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4월 “중국이 운용하는 전함은 234척으로 미 해군의 219척(군수·지원용 제외)보다 많다”며 “중국은 조선업의 생산능력이 미국의 약 230배라 전쟁 시 손상된 함정을 더 빨리 수리하고, 대체 함정을 더 빨리 건조할 수 있지만 미국은 선박 건조 역량을 키우기 힘들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조선 강국인 한국·일본과 협력해 격차를 좁혀야 한다”고 공개 조언했다.

미 해군성 장관, 울산·거제 조선소 방문도

실제 지난 2월엔 방한한 카를로스 델 토로 미 해군성 장관이 HD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와 한화오션 거제 사업장을 방문해 협력 가능성을 모색했다. 토로 장관은 한화그룹의 이번 필리 조선소 인수에 대해서도 성명을 통해 “획기적인 사건”이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전문가들은 K조선이 올해 1500억 달러(약 209조원)에서 2029년 2300억 달러(약 320조원)로 53.3% 성장할 글로벌 함정(艦艇) 시장, 그리고 같은 기간 10.1% 성장할 글로벌 함정 MRO 시장(제인스·모도인텔리전스 전망치)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미국 진출을 계속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승한 SK증권 연구원은 “미국 조선업은 장기간 쇠퇴해 미 정부의 전폭 지원에도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의 중국 조선업 제재까지 더해 한국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분석했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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