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45일 말린 ‘동해표 보리굴비’…기름진 살 결대로 발라져

2024. 6. 29.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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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희의 맛따라기

45일 말리고 쪄서 구운 굴비, 청어회무침, 꽃게와 홍게 간장게장이 오르는 보리굴비정식. 반찬의 채소류는 대부분 직접 재배했다. [사진 이택희]
지난겨울, 속초에서 보리굴비를 말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기가 나지 않는 동해에서, 잡히는 철도 아닌데 웬 보리굴비일까. 조기는 3~6월 서해를 북상하며 회유하는 어종이고, 진달래가 필 무렵 영광 법성포에 조기 파시가 열리면서 굴비를 말렸다. 게다가 아버지가 알려준 방법대로 말린다고 했는데 속초 토박이 아버지가 굴비 말리는 걸 어떻게 알고 대물림까지 했을까.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큰 눈이 내린 2월 초, 속초에 간 길에 찾아갔다. 속초에 갈 때마다 한 번은 들르는 9년 단골 청호동 아바이마을 ‘옥이네밥상’이다. 여주인 김옥이(66)씨는 묻지도 않고 이곳에선 먹어본 적 없는 보리굴비 정식 상을 차렸다. 흔히 보리굴비라 하는 것들은 맛이 기대와 달라 찾지 않은 지 오래됐는데 여기는 달랐다. 간이 잘 오르고 살도 제법 꾸덕했다. 이 식당이 28년 청호동 시대를 마감하고 지난달 16일 강원 양양군 강현면 강선리 개울가로 옮겼다. 동해고속도로 북양양IC에서 4㎞, 물치항에서 물치천을 따라 설악산 방향으로 2㎞ 거리다.

12월 중순부터 2월 말까지만 건조

이사하고 보름 되는 날 찾아가 새로운 대표 메뉴 보리굴비 정식을 다시 맛봤다. 보리굴비(1인 1미), 청어회무침, 꽃게·홍게 간장게장, 된장찌개, 직접 키우고 제조한 쌈채소와 쌈장에 8찬이 상에 올랐다. 반찬은 유자·대추청에 무친 도라지, 무초절임, 멸치볶음, 샐러리·깻잎·무 장아찌, 배추김치, 오이소박이 등이다.

굴비 얘기부터 물었다. 조기를 청호동 살림집 옥상에서 바닷바람과 햇빛에 45일 말렸다고 한다. 참조기는 아니고 조기 유사종이었다. 어판장에서 떼어온 생선을 소금물에 이틀 담갔다가 건져서 말린다. 배도 따지 않고 비늘도 치지 않는다. 비늘은 말리면서 떨어지고, 구울 때 타서 없어지기도 한다. 간은 좀 세게 한다. 싱겁게 말리면 맛이 덜하다. 건조는 12월 중순부터 2월 말까지만 한다. 이 시기가 지나면 맛이 없다고 한다.

이 방법을 속초 외옹치 출신의 오징어배 선장이던 아버지(1923년생)한테 배웠다. 아버지는 동해 울릉도 해역부터 서해까지 다니며 조업했다. 출항하면 60일 만에 돌아왔고, 매번 갔던 지역 특산물을 챙겨 왔다. 서해 쪽으로 갈 때는 그곳 사람들에게 배워서 말린 굴비를 가지고 오기도 했다. 반드시 45일을 말린다고 했다.

상에 낼 때는 증기로 찌고 한 번 굽는다. 오래 말려서 그런지, 조리법 덕분인지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살은 부서지지 않고 결대로 잘 발라진다. 간이 속속들이 배서 물에 만 밥에 올려 먹기에 딱 좋다. 요즘 굴비라고 하는 것들과는 맛이 적잖이 다르다. 초등학생 때부터 55년 넘게 일상생활로 생선을 다뤄온 세월의 내공이 굴비에도 배어 있었다. 이 메뉴를 만들려고 굴비 말리는 연습을 여러 해 했다. 지난겨울에는 이사를 앞두고 2000만원어치를 말렸다 한다. 옥상 건조대 위에 펼친 망에 널고 망을 다시 덮어 겨울바람 쐬어 말린 것이다.

굴비의 사전적 정의는 염장해 건조한 조기를 말한다. 보리굴비는 만드는 방법이 아니라 보관법이다. 오래 말린 굴비를 독에 그득한 보리 알곡 사이에 차곡차곡 저장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생선 저장법이다. 날씨가 더워지면 굴비에서 기름이 배어 나와 산화하면서 맛이 변한다. 보리 속에 묻어두면 변질이 덜했다.

오징어배 선장 부친, 서해 조업 때 배워

28년 된 ‘옥이네밥상’ 단골들이 많이 찾는 반건조 생선찜을 조리하는 김옥이씨. [사진 이택희]
영광 법성포에서는 배를 갈라 말리면 가조기, 통으로 말린 건 굴비라고 했다. 전통 굴비는 소금 간을 세게 하고, 오래 말렸다. 입맛이나 시설이 달라진 요즘은 심심하게 염장해 2~3일 말리고 냉장시설에 저장한다. 이걸 예전에는 ‘물굴비’라고 했는데 요즘은 굴비로 통용된다. 보리굴비가 흔해졌지만, 진품 보리굴비는 웬만해서는 볼 수 없는 귀물이다. 음식점에서 먹는 보리굴비는 내막을 들여다보면 보리 구경도 못 한 물굴비가 대부분이다.

‘옥이네밥상’의 보리굴비도 엄밀히 보면 보리굴비가 아니라 그냥 굴비다. 참조기가 아닌 건 너무 귀하고 비싸니 어쩔 수 없다 쳐도, 보리 항아리에 들어간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맛은 보기 드물게 옛 굴비와 비슷하다. 자연건조 시간이 겹겹이 쌓은 맛이리라.

함께 나온 청어회무침은 이 집의 숨은 별미다. 새끼손가락 크기로 자른 싱싱한 청어 살에 상추, 물미역, 쑥갓, 양파, 적채, 치커리 등을 넣고 초고추장으로 버무렸다. 애주가라면 술 없이 먹기 어려운 안주다. 간장게장도 주인이 ‘약간장’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간장으로 짜지 않게 담가 건건이 구실을 톡톡히 한다. 직접 갈무리해 조리하는 청호동 시절 대표 음식인 반건조 생선 구이와 찜, 가오리찜도 여전히 한다.

음식 재료는 기본적으로 동해와 설악산 자락에서 나는 것이다. 해산물은 태어난 청호동 갯배마을 동네 오빠들에게 배에서 직거래로 받는다. 채소는 대지 2116㎡(640평) 식당 옆의 1355㎡(410평) 비닐하우스 농장에서 키운다. 그래서 품질은 믿을 수 있고, 원가는 훨씬 저렴하다.

옥이씨는 친구들이 중학교에 갈 때 설악동 여관 주방으로 일하러 다녔다. 수학여행단 1500명을 수용하는 곳에서 1972년 열다섯 살에 시작해 7년을 했다. 하루 쌀 한 가마니(80㎏)씩 밥을 지으며 서울에서 온 흰머리 주방장 할머니에게 온갖 요리를 다 배웠다. 그리고 1996년 3월 식당 주인이 됐다. 그렇게 사느라 가족 여행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새 건물 지어 음식점 이사하고 나니 ‘이렇게 살아온 인생 뭐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좀 쉬면서 살기로 했다. 이달부터 매주 수요일을 휴일로 정했다. 9년을 왕래하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 중앙일보 기자. 늘 열심히 먹고 마시고 여행한다. 한국 음식문화 동향 관찰이 관심사다. 2018년 신문사 퇴직 후 한동안 자유인으로 지내다가 현재는 경희대 특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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