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출전 포기한 육상왕 리델…57년 뒤 '불의 전차'로 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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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전설의 순간들] ③ 1924년 파리올림픽
예레바탄 사라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공사를 시작해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다 지었다. 로마의 기독교가 들불처럼 타오를 때다.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내전에서 막센티우스와 싸울 때 태양 위에 떠오른 십자가를 보았다. 거기 ‘십자가의 깃발로 싸우라’고 쓰였다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X와 P를 새긴 깃발을 들고 싸워 세 배나 많은 적을 무찔렀다. 그는 이듬해 밀라노 칙령을 선포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기독교 박해의 시대는 끝났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로마 황제들은 모두 ‘나 외에 신은 없다’는 하느님을 믿었다. 이런 황제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온갖 신들을 다 모시는 이교도의 제전이 폐지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393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폐지를 명하는 칙령을 선포함으로써 고대올림픽은 이듬해 열린 제 293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종막을 고했다.
유럽의 역사를 떠받치는 두 기둥은 희랍 정신과 기독교 정신이다. 유럽의 지성은 그리스 로마 고전의 유산이다. 유럽 철학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그어 놓은 금 밖으로 나가기 어렵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은 살아 숨 쉬는 신의 존재를 역설적으로 예언한다. 예레바탄 사라이에 처박힌 메두사의 머리는 기독교가 봉인한 희랍 정신이 아닐까. 희랍 정신은 르네상스를 맞을 때까지 기나긴 잠 속에 빠져들었다.
이교도 제전, 첫 근대올림픽까지 깊은 잠
이번 올림픽은 난장과도 같았던 24년 전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각국 스포츠 단체들은 올림픽에 진심이었다. 참가국들은 최고의 선수를 선발해 파견했다. 스타드 올랭피크 이브 뒤 마누아르 경기장에서는 관중 1만9052명이 올림픽 역사상 첫 개막식을 지켜봤다. 파리는 선수촌, 라디오 생중계, 현대 올림픽과 흡사한 폐막식 등 최초의 기록을 잇달아 써 내려갔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
에서 올림푸스의 신에 빗대 예술을 두 가지로 분류했다. 아폴론은 단정하고 엄격한 형식미, 디오니소스는 열정적이고 역동적인 창조성을 암시한다. 올림픽은 디오니소스적 제전이다. 테오도시우스는 다시 태어나도 올림픽을 폐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의 제전 한가운데 신의 소명에 복무한 사나이가 있다. 에릭 헨리 리델, 영국인이다.
리델은 1902년 중국 샤오창에서 선교사 부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 영국으로 돌아간 뒤 엘탐 칼리지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뛰어난 운동 실력을 발휘했고, 특히 육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20년 에든버러대학에 입학한 뒤 영국에서 열린 여러 대회를 휩쓴다. 그는 영국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였다. 영국 국민들은 리델이 파리 올림픽 100m에서 우승하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하느님에겐 다른 계획이 있었다.
1924년 1월, 올림픽 경기 일정이 발표됐다. 100m 예선은 7월 6일, 결선은 13일에 열렸다. 모두 일요일이었다. 기독교도들에겐 하느님의 날, 곧 주일이다. 리델은 주일성수(主日聖守)를 선언한다. 경기 출전을 포기한 것이다. 여론이 들끓었다. 비난과 애원이 이어졌다. 훗날 에드워드 8세가 되는 웨일즈 왕자까지 친서를 보냈다. 리델은 요지부동이었다.
“주일에는 달릴 수 없습니다.”
결국 리델 대신 해롤드 아브람스가 100m 경기에 나가 금메달을 따냈다. 리델은 7월 9일에 열린 200m 결선에서 21초9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틀 뒤엔 400m 결선에 나간다. 그의 주종목이 아니었다. 아무도 그의 우승을 기대하지 않았다. 리델은 출발 신호가 울리자 총알처럼 치고 나갔다. 200m도 300m도 같은 속도로 달렸다. 47초6, 세계 신기록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 200m는 제 힘으로, 나머지 200m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달렸습니다.”
파리 올림픽이 끝나고 일주일 뒤 리델은 에든버러대학을 졸업한다. 졸업 후 계획을 묻자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했다. 1925년 영국을 떠날 때 그의 나이 23세. 톈진에서 12년, 산둥반도에서 7년 동안 선교사로 일했다. 중일전쟁이 터진 다음 일본군이 웨이팡에 설치한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1945년 2월 21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리델은 영국인의 가슴에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남았다. 불꽃은 두 차례 빛을 냈다. 1981년, 휴 허드슨이 영화 ‘불의 전차(Chariot of Fire)’를 제작했다. 조금 각색됐지만 에릭 리델과 해롤드 아브람스의 이야기다. 영화는 1982년 아카데미영화제 작품상·각본상·음악상·의상상을 휩쓸었다. 2012년 7월 28일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사이먼 래틀은 런던심포니를 지휘해 반젤리스가 작곡한 ‘불의 전차’의 테마를 연주했다. ‘미스터 빈’ 로완 앳킨슨이 키보드 연주자로 등장한다.
리델이 트랙의 제왕이었다면 조니 와이즈뮬러는 수중의 황제였다. 와이즈뮬러는 1904년 지금의 루마니아 티미쇼아라 근처에서 태어나 3세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가정형편은 어려웠고, 그래선지 9살 무렵 영양실조와 소아마비를 앓기 시작했다. 의사는 소아마비 치료를 위해 수영을 권했다. 와이즈뮬러는 수영에 열중했다. 수영 코치 윌리엄 바크하치가 그의 재능을 발견하면서 와이즈뮬러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의 수영 실력은 일취월장, 1922년 미국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와이즈뮬러는 파리 올림픽에서 자유형 100m, 400m, 800m 계영 금메달을 따냈다. 수구 경기에도 출전해 동메달을 보탰다. 4년 뒤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도 자유형 100m와 800m 계영에서 우승했다. 그의 몸값이 치솟았다. 광고업자들이 주변에 들끓었다. 영화계도 잘생긴 얼굴과 늘씬한 체격에 주목했다. 와이즈뮬러는 1929년 영화계에 발을 들였고, 3년 뒤 대박을 터뜨린다. 1932년 밴 다이크가 연출한 ‘유인원 타잔’이다. 그의 이름은 올림픽 5관왕이 아니라 타잔으로 기억에 남았다. 돈도 많이 모았지만 얼굴값을 하느라 다섯 번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 멕시코의 휴양지 아카풀코에서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신이 모든 것 결정, 근육은 고무덩어리”
파리 올림픽에서 스토리를 떼어내고 경기력만 본다면 파보 누르미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누르미는 1920년 안트베르펜부터 1928년 암스테르담까지 세 차례 올림픽에서 금메달 9개를 목에 걸었다. 파리에서만 1500m, 5000m, 3000m 단체, 크로스컨트리 1만m 개인·단체 등 5종목에서 우승했다. 1924년은 누르미의 전성기였다. 주일이든 아니든 상관 없었던 북구의 사나이는 최고 45°C나 되는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7월 10일 1500m에서 올림픽기록(3분53초6)으로 우승한 누르미는 1시간 30분 뒤 5000m에 출전했다. 이번에도 올림픽기록(14분31초2)으로 우승했다. 그는 말했다.
“정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근육은 단지 고무덩어리와 같다. 나의 정신력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다.”
누르미는 ‘핀란드의 손기정’과 같다. 핀란드는 ‘핀 족(族)의 나라’다. 민족도 언어도 주변 국가와 다르다.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핀란드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틈타 독립했다. 신생 핀란드 국민의 마음을 한 데 모으는 존재, 그가 바로 누르미였다. 누르미는 핀란드 민족주의의 상징이 됐다. 유럽의 통화가 유로화로 통합되기 전까지 핀란드의 10마르카 지폐에는 누르미의 모습이 인쇄됐다. 그의 별명은 ‘나는 핀란드인(Flying Fin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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