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노인들이 인문학 강의에 부흥회처럼 열광한 까닭은?

손관승 글로생활자 2024. 6. 29.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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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손관승의 영감의 길]
지식과 정보의 홍수에서 청중의 마음을 얻는 법
신흥종교 부흥회처럼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이곳은 경북 의성군립도서관. "나이는 들어도 정신적으로는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하자 수강자들이 경쟁적으로 손을 들었다. /손관승 제공

오늘도 새벽에 지방 출장을 떠난다. 새벽 공기가 주는 팽팽한 긴장과 설렘, 그 아슬아슬함을 사랑한다. 소속된 곳은 없어도 언제나 출장용 가방을 챙겨야 하는 삶이 그리 싫지는 않다. 강연자는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가 말하는 지식근로자에 속한다. 지식근로자는 각자 한 명의 경영자가 되어 이전의 어떤 사회보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되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고 드러커는 예언하였다.

그의 예견처럼 지식은 흔하고 정보는 널려 있는 시대다. 유튜브에도 자칭 전문가들이 넘쳐 소음과 신호를 구분하기 어렵다. 홍수에 마실 물이 귀한 것과 같다. 요즘 강연하겠다는 사람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강연자로 가장 유망한 사람은 불문학과 출신’이라는 아재 개그가 생겨날 정도다. 전공 불문, 직업 불문, 나이 불문이기 때문. 전문가라고 강연을 다 잘하는 것은 아니다. 지식 정보를 다루기는 하지만 강연은 감정노동에 가까워 청중의 반응, 즉 리액션으로 먹고산다. 연단에서 마이크 잡고 열심히 떠들고 있는데 꾸벅꾸벅 졸거나 스마트폰으로 딴짓하는 사람이 보인다면 수강자의 마음과 귀가 닫혔다는 뜻이다. 가끔 하소연도 듣는다. “졸고 있는 청중을 깨우는 비법은 없나요? 열심히 준비해 갔는데 미치겠어요!”

과연 저 강좌명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 /손관승 제공

특히 중년 남성 공무원, 언론인, 중학생 상대 강의를 ‘강연자의 3대 무덤’이라 한다. 리액션, 즉 청중의 반응이 소극적이거나 ‘당신 얼마나 잘하나 보자’라는 냉소적 분위기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귀가 열리지 않는 법, 먼저 마음의 문부터 열어야 한다. 스탠딩 코미디 창시자 빅터 보르게는 “웃음은 두 사람 사이에 가장 가까운 거리”라 했다지만, 웃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게 어설픈 유머는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온다. 실리콘밸리와 월스트리트의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프레젠테이션 10계명 중 제1 계명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신의 청중이 누구인지 파악하라!” 지식 수준과 수강 목적 등에 따라 강연자가 하고 싶은 말과 청중이 듣고 싶은 말의 갭을 줄이라는 뜻이다. 많은 강연을 하는 나 역시 최근 크게 당황한 일이 있다.

경북 의성군립도서관에 출장 갔을 때였다. 도시와 농촌 복합지역에 양질의 인문학을 보급한다는 취지로 시리즈 강연 첫날 담당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30분 전 강의장에 도착해 둘러보다가 가슴이 철렁했다. 농촌지역에 사는 70대와 80대분들이 주로 모여 있는 게 아닌가. 설마 내 강의를 듣기 위해 온 분들이 아니겠지, 도서관 직원에게 슬쩍 물어보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지난해 같은 지역 다른 도서관에 5회 연속 강연했을 때는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다양한 연령층에다 지식의 수용 능력도 상당히 높았기에 아무 걱정 없이 왔다가 의외의 상황과 마주친 것. 낮과 저녁 시간의 차이였다. 제안받은 강의는 ‘길 위의 인문학-산티아고 순례길’이었는데, 산티아고 걷기 붐을 일으킨 파울루 코엘류나 피레네산맥을 넘어 작가의 꿈을 이룬 헤밍웨이를 언급할 분위기가 영 아니었다. 개그맨처럼 웃길 재주도 없지만 강의 취지는 그래서도 안 되었다. 어디에 숨거나 도망치고 싶었다.

의성군립도서관 강연의 시작은 이랬다. /손관승 제공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까? 준비한 파워포인트는 잠시 잊고, 내 심장이 이끄는 대로 마이크를 들고 청중 속으로 들어갔다. 무더운 날씨에 왜 이곳까지 왔는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볼펜을 꼭 쥐고 메모할 채비를 갖추고 있는 분들에게 먼저 물었다. “평소에는 복지회관에서 고스톱 치면서 소일하는데 좋은 말씀 해준다는 얘기를 듣고 왔어요.” “서울에서 일류 강연자가 온다는 소식 듣고 배우고 싶어서 참석했어요.” 지금 병석에 누워 계신 나의 어머니 모습이 겹쳐 보여 뭉클해졌다. 비록 일류 강연자는 아닐지언정 제대로 배우지 못해 관공서나 병원의 복잡한 서식 앞에서 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엄마 세대의 한을 풀어 드리자!

‘결핍’을 화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배움의 결핍, 애정의 결핍, 주머니의 결핍 등 종류만 다를 뿐 결핍 없는 사람은 없으며 인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니까. 배움이 적다고 부끄럽게 생각 말고 도서관으로 걸어 나와 함께 배우고 함께 밥을 먹고 서로 ‘리액션’ 하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이는 들어도 정신적으로는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하자 수강자들이 경쟁적으로 손을 들었다. “아이들이 떠나고 얼마나 허전한지 몰라요.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참 힘들었어요.” “학교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해 창피하다고 생각했는데 도서관 강연에 자주 와봐야겠습니다.”

경북 의성군립도서관. /손관승 제공

약속된 두 시간이 흐를 무렵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마치 신흥종교 부흥회처럼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라 모두 일어나 이렇게 외치는 것이 아닌가. “인생은 리액션!” “다음 주에도 손관승 선생 부르자!” 특별한 이야기를 한 것은 없고 진정으로 그분들의 마음에 다가가려 했을 뿐이다. 마무리하는데 최연장자인 93세 할머니가 주머니 속 사탕을 꺼내 손에 쥐여주며 한마디. “드릴 건 없어서 이 말로 고마움을 대신하고 싶어요. 마음속에 앙금 있으면 담아두지 마세요. 시간이 해결해 주더라고. 이 나이까지 내가 건강히 사는 비결이라오.”

고속도로 왕복 운전 9시간에 무덥고 지친 날이었지만 강연자로서 장벽 하나를 넘은 기분이다. 강연이든 무엇이든 ‘같이’할 때 ‘가치’가 있다는 삶의 이치였다. 할머니가 건네준 사탕 껍질이 황금처럼 빛났다.

93세 할머니가 건네주신 그 사탕. “드릴 건 없어서 이 말로 고마움을 대신하고 싶어요. 마음속에 앙금 있으면 담아두지 마세요. 시간이 해결해 주더라고. 이 나이까지 내가 건강히 사는 비결이라오.” /손관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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