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한 소설이 만든 그늘, 기이한 이야기가 일으킨 바람 속으로
동경
김화진 장편소설 | 문학동네 | 224쪽 | 1만5500원
물을 수놓다
데라치 하루나 장편소설 | 북다 | 312쪽 | 1만6800원
작은 종말
정보라 단편선 | 퍼플레인 | 372쪽 | 1만8000원
점점 더 뜨거워진다. 지구가 이상기후와 더위에 시달리고 있다. 통상 북반구의 무더위는 7~8월이 최고조다. 하지만 올해는 6월 중순부터 세계 곳곳이 폭염에 신음하고 있다. 베이징·아테네·뉴델리 등 주요 도시들은 최고기온이 섭씨 40~50도까지 치솟는 중이다. 한국의 6월도 만만치 않았다. 기상청에 따르면 올해 폭염 일수는 평년(1991~2020년 평균)의 4배에 달한다. 이 뜨거운 열기를 어떻게 식힐까.
Books가 매달 선보이는 ‘지금 문학은’ 특집 이달의 키워드는 ‘여름날의 샤워’다. 소설가 김화진·데라치 하루나·정보라가 만든 ‘그늘’은 가볍고, 청량하고, 시원하다. 내리쬐는 볕에 달궈진, 열기를 잔뜩 머금은 피부가 식는 듯하다. 찬물 샤워를 하는 것 같은 소설들이다.
◇열대야 직전, 초여름 밤의 선선함
‘옷이 가벼워지는 계절엔 마음도 가벼워졌다. 상냥하지 않은 습도와 온도에도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 하나였다.’ ‘밝은 하늘을 보는 시간이 길면 시간을 덤으로 얻은 것 같아 좋았다. 퇴근길에도 지치지 않을 수 있었다.’
김화진의 ‘동경’은 이런 문장들로 시작한다. 기세 좋게 푸른 통통한 나뭇잎, 초여름의 장미 덤불, 식당 유리문에 붙은 ‘콩국수 개시’…. 선선한 여름 묘사가 주변 온도를 슬며시 낮춘다. 열대야가 오기 전 초여름 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는 기분이다. 더위로 인한 짜증이 한풀 가신다.
‘동경’은 아름·민아·해든, 세 여성의 우정 이야기다. 너무나 다른 세 사람은 다르기에 균형 잡힌 삼각형 같은 관계를 유지한다. 한 명이 삐죽 튀어나가는 등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균형이 어그러지지만, 서로 동경하는 마음 덕에 다시 균형을 찾는다. 셋의 관계는 삼각 편대로 묘하게 굴러간다.
특별한 사건 없이도 세 사람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잔잔하게 읽히는 청량한 청춘 소설. 최근 한국 문단에서 주목받는 젊은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김화진은 단정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사려 깊게 인물을 그린다.
◇나답게 사는 청량한 가족 이야기
데라치 하루나의 ‘물을 수놓다’는 더욱 청량하다. 가족 이야기지만 질척이지 않는다. 일본 소설 특유의 가벼움이 매력이다. 바느질을 좋아하는 남고생 기요스미가 귀여운 것을 싫어하는 누나 미오의 웨딩드레스를 만들어주기로 하면서 6인 가족 사연을 펼쳐보인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열정은 누구 못지않지만, 지독한 생활 무능력자인 탓에 이혼당한 아빠 젠. 그런 젠을 모른척하지 못하고 일거수일투족을 챙기는 대학 친구이자 의류 공장 사장인 구로다 등. 여러 갈래의 물길이 모여 하나의 급류를 이룬다. 이들도 ‘가족’이 아닐까. 작가는 혈연으로 얽매인 전통적 가족의 울타리를 넓혀본다.
소설 속 인물 모두 각자 나름의 이유로 사회가 요구하는 ‘보통’에 미치지 못해 고민한다. 하지만 소설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길 주저하지 말라고, 틀 안에서 아등바등 살려고 애쓰지 말라고 한다. 대신 ‘나답게 살아가는 떳떳함’을 응원한다. 고민 끝에 수영 강습을 시작한 일흔넷 할머니 후미에는 수영장 옆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물에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젊은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풀 사이드의 개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훅훅 읽다 보면 마음 한구석이 시원해진다.
◇젖고, 버려지는 서늘한 사라짐
정보라의 단편선 ‘작은 종말’도 나답게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을 담은 단편 ‘지향’으로 문을 연다. 여름의 초입인 6월이면 전 세계 곳곳에서 성소수자 인권의 달을 맞아 ‘프라이드(pride) 행사’가 열린다. 소설 속 ‘나’는 퀴어 축제에서 행진하며 세상을 떠난 무성애자 ‘강’을 떠올린다. ‘나’는 고장 난 존재는 없다고, 다채로운 물결이 존재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밖에도 정보라다운 기담이 더운 열기를 확 식혀준다. 신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기계가 되길 강요받는 사람들(‘작은 종말’) 이야기와 자꾸만 서가에 물이 흥건히 고이는 미스터리(‘도서관 물귀신’) 등이 눈길을 끈다. 표제작은 효율만으로 따지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라져야 마땅하다는 결론에 이른 사회의 단면을 비춘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기계가 되기로 한다.
진짜 무서운 건 물귀신이 아니라 소설 속 삭막한 현실이다. 예산 삭감으로 국공립 도서관은 ‘노키즈존’으로 운영된다. 15세 미만은 도서관에 오려면 ‘출입 사유서’가 필요하다. “세금도 안 내는 미성년자들이 와서 책을 공짜로 보고, 와이파이도 마음대로 쓴다”는 것이다. 대출 빈도가 적은 책에는 낮은 점수가 매겨져 버려지고, 물에 젖은 책은 예산이 없어 복구되긴 글렀다. 이런 사라짐은 어쩐지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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