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시원하고 달콤한 원두막 낮잠
요즘처럼 ‘고창 수박’이 유명해지기 전에도 구릉이 많아서 그랬는지 내 고향 고창에는 유난히 수박밭이 흔했다. 밭 한가운데에는 으레 원두막이 들어섰는데, 에어컨이 없던 그 시절 원두막은 최고의 피서지였다. 한쪽에 놓인 두툼한 이불이 말해주듯 한밤중에는 제법 서늘하기까지 했다. 모기향을 피우고 수박 한 통 쪼개 먹으며 밤늦게까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 무더위도 쫓고 수박 서리하러 오는 밤손님도 쫓으니 일석이조(一石二鳥)였다. 여름 내내 친구들 사이에선 수박 서리 무용담이 화제였다.
이슥한 밤에 주인이 잠들기를 기다리며 숨죽이고 엎드려있다가 주인보다 먼저 잠드는 바람에 덜미를 잡혀 곤욕을 치른 이야기에 우린 함께 낄낄거렸다. 그러나 설령 수박 두세 통을 잽싸게 서리해왔다고 해도 먹을 수가 없었다. 대낮에 두 눈 크게 뜨고 통통 두드려가며 감별해도 잘 익은 수박을 고르기가 어려운데 한밤중에 주인 몰래 급하게 따온 수박이 제대로 익었을 리가 만무하니 말이다. 설익어 낭패지만 우리는 수박을 먹는 것보다 스릴을 즐기는 쫄깃한 맛에 속없는 짓을 했다. 시골이라 이층집이 드물던 어린 시절에는 다락방이나 원두막처럼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도 신기했다.
그런데 어쩌다 수박밭에 찾아가 수박 서너 통과 참외 한 접씩을 사는 어머니를 따라가면 맘 좋은 주인이 원두막에서 수박을 대접했다. 허술한 사다리 서너 개를 밟고 올라가 원두막에 턱 하니 자리 잡으면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이 온통 내 발아래 있는 것처럼 짜릿했다.
지금은 에어컨 바람 써늘한 고층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그때의 그 신바람 나는 기분을 다시 느낄 수가 없다.
사진가 김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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