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란 “역도보다 무거운 인생... 으라차차 힘을 내 견딥시다”

박돈규 기자 2024. 6. 29.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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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박돈규 기자의 2사 만루]
파리올림픽 앞둔 ‘역도 영웅’
장미란 문체부 2차관
장미란 문체부 2차관이 서울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앞에 앉아 있다. 올림픽 역도에서 금·은·동메달을 딴 그는 “요즘도 일주일에 4~5일 운동하지만 무게는 100㎏까지만 든다”며 “파리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이 노력한 만큼의 결실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역도 영웅’을 만났다. 올림픽 금·은·동메달을 따고 은퇴한 지 11년. 길에서 마주쳐도 이 사람이 그 사람인 줄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 전성기 때 무거운 역기를 번쩍 들고 있는 순간으로 깊이 각인된 거인이라 지금 모습이 더 낯설어 보였다.

장미란(41) 문체부 2차관은 윤석열 정부가 드물게 잘한 인사로 꼽힌다. 작년 여름부터 인터뷰하자고 노래를 불렀는데 “아직 업무 파악이 안 됐다”며 거듭 미루다 해를 넘겼다. 역도 영웅이 ‘어공(어쩌다 공무원)’으로 나랏일을 한 지 어느덧 1년. 프랑스 파리 올림픽 개막을 한 달 앞두고 마침내 마주 앉았다.

지난 26일 국민체육진흥공단 회의실. 장미란 차관은 “오늘 머리카락은 힘을 좀 줘야 할 것 같아 앞집 언니한테 부탁했다”며 소탈하게 웃었다. 두 시간 대화하는 동안 ‘선수는 종목을 닮는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역도(力道)란 무엇인가. 누가 더 무거운 바벨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지 겨루는 스포츠다. 복잡한 룰도 속임수도 없다. 장미란도 간단명료했다. 그런데 어떤 말은 날마다 5만㎏씩 들어 올린 사람답게 묵직하게 들렸다.

“은퇴하고 보니 즐거운 날보다 힘든 날이 많았어요. 참고 참다가 어느 날 감당할 수 없는 일이 터졌지요. ‘무거운 중량을 드는 게 전문이었지만 이건 너무 무거운 것 같아요’라고 기도하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울고 나서 한결 가벼워졌어요. 역도도 인생도 무게를 견디며 사는 것이더라고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장미란은 인상(140kg), 용상(186kg), 합계(326kg) 모두 세계 신기록을 들어 올렸다.

◇반복하는 것을 좋아했다

장미란은 중3 때 강제 다이어트로 역도를 시작했다. 잘 먹어서 체구가 컸지만 달리기나 멀리뛰기를 잘할 만큼 운동신경도 있었다. 장미란을 처음 본 역도 코치는 “어우, 어우, 어우, 너무 좋다”고 감탄했다.

-중3 여름방학 땐 울면서 돌아왔고 그해 겨울방학부터 시작했다고요?

“하기 싫은 역도를 시켜서 ‘엄마 혹시 계모 아니냐’고 울었지만, 저는 부모 말씀 잘 듣는 착한 아이였어요. 강원도 원주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은 그것뿐이었습니다. 15㎏부터 들었는데 하나도 안 무거웠어요. 자세를 금방 터득했고 기록도 쑥쑥. 1주일 만에 대회에 나갔어요(웃음).”

-인정 욕구가 강했나요.

“학교에선 공부 우등생 말고는 칭찬받을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역도는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신이 났습니다. 일주일 동안 계획 세워 운동하면 다 목표대로 되는 거였어요. 너무 재밌었죠.”

-6개월 만에 전국 대회에서 3등을 했다고요?

“네. 그다음부턴 계속 1등이었어요. 국가대표로 뽑혀 태릉선수촌까지 갔지요. 연습량이 많을 땐 하루에 5만㎏을 들었어요. 2002년에 들어가서 2012년까지, 스무 살부터 서른 살까지 태릉에서 청춘을 보냈어요.”

-그 10년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웃으며) 룰루랄라!”

-날마다 무거운 중량을 드는 게 그토록 즐거웠나요?

“저는 사실 반복하는 걸 좋아해요. 실력이 갑자기 늘 순 없잖아요. 제 장점이자 단점은 잘 잊어버리는 거예요. 안 좋은 일은 더 빨리. 1년 365일 중에 기록이 늘고 신나는 날은 사실 65일밖에 안 돼요. 나머지 300일은 장미란도 힘들고 괴롭고 운동하기 싫죠. 그런데 65일 좋으니 300일을 가볍게 잊을 수 있었어요. 그렇게 10년을 반복했습니다.”

-벼락같은 깨달음의 순간이라면.

“사람들은 자기 한계를 정해 놓잖아요. 푸시 프레스 최고 기록이 130㎏이었는데 전지훈련을 갔더니 중국 선수가 145㎏을 하는 거예요. 한국 여자 중엔 내가 최고인데 ‘어, 나도 저만큼 할 수 있겠다’ 깨달았지요. 그 전지훈련 기간에 140㎏으로 늘렸고 나중엔 150㎏까지 갔어요. 깨달음이라면, 한계에 나를 가두지 말자.”

-역시 하면 되는군요.

“저는 ‘하면 된다’는 그 말이 좋으면서 싫었어요. (왜냐고 묻자) 안 하면 안 되는 거니까, 하면 되지만 힘드니까. 하하. 지금은 웃지만 그렇게 아프고 고독한 시간들이 다져져야 기록이 나아져요. ‘내가 더 올라갈 수 있구나’를 몸으로 배웠어요. 그래서 그 시절이 ‘룰루랄라!’예요.”

-중국의 무솽솽 선수가 라이벌이었지요?

“만만치 않은 존재가 있다는 건 부담인 동시에 정진하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무솽솽이라는 친구는 제게 스트레스이자 자극이었어요.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2㎏ 차이로 지고 나니 더 큰 산처럼 보였지요. 내가 과연 넘을 수 있을까? 이듬해 세계선수권 때는 무솽솽이 실수하기를 바라고 있더라고요. 내가 1등 하고 싶어서 남이 실패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게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날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어떻게요?

“무솽솽아, 너 준비한 거 다 해라, 나도 내가 준비한 거 다 할 테니까. 누가 더 노력했는지는 하늘이 알 거야. 그러자 마음이 되게 편해졌어요. 결국 제가 이겼죠.”

-역도란 어떤 종목인가요.

“호명되면 1분 안에 플랫폼에 올라가 역기를 들어야 해요. 손에 탄마 가루를 묻히고 심호흡을 합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들다가도 그 순간부터 무아지경이에요. 역도에서 ‘성공’은 역기의 무게중심과 내 몸의 중심이 일치됐다는 뜻입니다. 부담되는 중량도 성공하면 거짓말처럼 하나도 안 무겁지요(웃음).”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만난 장미란 문체부 2차관. "2007년 세계선수권에서 무솽솽을 이긴 날 밤에 이상하게 잠을 잘 못 잤어요. 성경책을 폈는데도 잠이 안 올 정도였지요(웃음). 정말 좋은 승부를 했다는 기쁨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영웅에서 인간으로

올림픽 여자 역도 무제한급에서 장미란은 2004년 아테네 은메달, 2008년 베이징 금메달, 2012년 런던 동메달을 수확했다. 국민체육진흥공단에 따르면 올림픽 금·은·동을 모두 가져온 한국 선수는 9명뿐이다.

-베이징에서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랐는데.

“그 시합은 ‘장미란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목표대로 인상, 용상, 합계에서 모두 세계 신기록을 세웠어요. 그런데 금메달이 아주 기쁘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구나, 라는 안도감이 들었죠.”

-런던에선 4등이었는데 도핑 적발로 나중에 동메달을 받았지요. 행복감은 금·은·동 순이 아니라면서요?

“제가 받아보니 다른 종류의 기쁨이더라고요. 아테네에서는 얼떨결에 했는데 받아서 감사, 베이징에서는 금메달 못 따면 큰일 날 것 같았는데 해내서 감사, 런던에서는 기대도 안 했는데 늦게라도 도착해서 감사….”

-바벨에 손키스를 한 장면은 뭉클했어요.

“런던 올림픽은 준비하면서 유일하게 몸이 아팠던 대회였어요. 왼쪽이 자꾸 무너지고, 자다 일어나서도 들던 무게를 그때는 못 했어요. 못 하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아 출전을 포기할까도 고민했습니다. 마지막 올림픽이라 손키스는 즉흥적으로 나온 행동이에요. 속으로 중얼거렸지요. 아쉽지만 그동안 고마웠다, 바벨아.”

2012런던올림픽 여자 역도 75㎏이상급에 출전해 2회 연속 금메달에 도전한 장미란이 용상3차시기에 실패해 동메달 탈락이 확정된 후 무릎을 꿇고 바벨을 만지고 있다. /올림픽공동사진기자단

-그 묵직한 쇳덩이 때문에 지금의 장미란이 있겠지요.

“그럼요. 저는 최선을 다했고 거기까지였어요. 런던에서 몸이 나한테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신호를 보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출발할 땐 ‘금메달과 은메달은 있으니 동메달을 더해 컬렉션을 완성해야지’ 했는데 4등이니 얼마나 낙심했겠어요. 그날은 셔틀버스 타고 숙소로 돌아가면서 울고, 샤워하면서 또 울고, 침대에 누웠는데도 눈물이 멈추질 않더라고요.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놀랍게도 꿀잠을 잤어요.”

-4등이 꿀잠을?

“이튿날 아침에 내가 괜찮다는 걸 직감했어요. 눈뜨자마자 배가 고픈 겁니다. 하하하. 그리고 몇 년 뒤에 동메달이 도착했잖아요. 그 일을 겪고 저는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했어요. 뭔가 잘 풀릴 땐 들뜨지 않도록 누르고, 잘 안 풀리면 ‘아직 때가 아니구나’ 생각하며 더 노력해요.”

-2013년 1월 은퇴할 때 기분은.

“시원섭섭. 선수들은 누구나 멋지게 끝내고 싶어해요. 좀 더 들어 올려야 하나, 생각하니까 세상 모든 짐을 다 진 것 같더라고요. 머릿속이 정말 무거웠어요. 그래서 은퇴를 결심했습니다. ‘실업자 장미란’으로 살아갈 일이 걱정됐지만 운동할 걱정에 비하면 훨씬 가볍더라고요.”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강조한 것이라면.

“너희들, 누가 알아주고 격려해주지 않아도 이렇게 매일 꾸준히 열심히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고 대단한 일이라고 말하곤 했어요. 사실 저한테 하는 말과 같았습니다. 장미란, 세상에 저절로 되는 것은 없어. 저절로 되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

장미란 차관은 “운동할 땐 인내를 배웠는데, 문체부 차관으로 일하면서 협력하고 조율하는 법을 배웠다”며 “생각의 폭과 깊이, 시야가 넓어졌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1년간 ‘어공’으로 살아 보니

장미란 용인대 교수는 지난해 6월 29일 문체부 2차관으로 지명됐다. 체육, 관광, 국정 홍보를 이끄는 자리. 1년이 된 감회를 묻자 “벌써 1년이 지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바빴다”며 “체육에 특화된 사람이라 관광 분야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균형감을 가지고 열심히 하다 보니 시간이 훅 갔다”고 했다.

-세종 청사로 첫 출근한 날 기억하나요? 차관 발탁에 대해 야권 일각에서 비판했는데.

“그때 제가 답했지요. 염려해주신 만큼 열심히 하겠다고. 그 이상으로 부응하겠다고. 스스로를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묵직한 것을 잘 들어 올리지만 문체부 차관은 다른 의미로 책임감이 무거웠을 것 같아요.

“운동할 때는 동료들과 함께 파이팅을 외쳤어요. 강단에선 쉽게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2차관 업무는 전혀 다르잖아요. 문체부만의 일도 아니에요. 좋은 정책을 만들어도 다른 부처와 협의해야 할 게 많더라고요.”

-겹겹의 허들을 넘어야 하겠지요.

“선수 시절에는 ‘마음먹는다고 갑자기 잘할 순 없다’는 진리를 배웠어요. 공부도 시간과 무게의 양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반복이더라고요. 여기 와 보니 ‘학교는 천국이었구나’ 싶습니다(웃음). 훨씬 더 큰 구덩이를 파서 채워넣어야 하는구나, 생각하니까 덜 지치더라고요. 이제 익숙해지고 재미도 붙었습니다.”

-돌아보면 무엇이 가장 어려웠습니까.

“운동이나 공부를 할 땐 좋은 아이디어를 바로 반영해 효과를 파악할 수 있었어요. 문체부에서는 그게 안 되니 힘들었죠. 아무리 좋아 보여도 여론을 듣고 검증할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설득하고, 양보하고, 조율하고…. 진행되는 속도가 더디지만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도록 계속 떠드는 게 중요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주신다면.

“초등학교 1~2학년 체육 수업이 ‘즐거운 생활’에서 분리된 거 아시나요? 그전부터 필요성에 공감한 분들이 꾸준히 논의해서 제가 있을 때 이룬 겁니다. 재임 기간에 성과를 내지 않더라도 이야기를 마르고 닳도록 반복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요.”

-학교 폭력이나 왕따도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발산하는 절대 시간이 줄었기 때문일까요?

“저뿐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전문가가 많아요. 내실 있는 체육 수업이 그만큼 중요한데 결정의 순간에 체육은 늘 후순위로 밀려나죠. 공부도 일도 체력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안타까워요.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녜요. 체육과 팀스포츠를 주기적으로 하면 남과 어울리는 법, 힘을 합치고 응원하는 법, 실패해도 일어서는 법 등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어요.”

충북 진천선수촌 역도장에서 '장미란의 후예' 박혜정(오른쪽) 등 파리올림픽에 도전하는 국가대표 선수들 격려하는 유인촌 장관과 장미란 차관. /연합뉴스

-체육 분야에서 앞으로 집중하고 싶은 일이라면.

“경기력 향상과 체육인 복지예요. 올림픽 금메달 안 따도 괜찮지만 솔직히 따면 국민도 행복하잖아요. 특히 우리나라 체육은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학교체육, 전문체육, 생활체육, 노인체육의 틀을 새롭게 더 주도적으로 잡아나갈 거예요.”

-지난 총선 전에 출마 제안을 받았나요?

“사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게 제안이었는지, 제가 말한 게 거절이었는지(웃음). 저는 제 소식을 언론을 통해서 알아요. 그런 소문이 있다길래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다들 나가는 줄 알아서 ‘아니다‘ 했더니 안 믿으시고. 하하. 생각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구체적인 제안은 없었어요. 지금은 차관직을 감당하기도 벅찹니다.”

-최근에 APEC 관광장관회의에 다녀왔지요?

“페루 리마에 갔는데 도심에 아침 일찍부터 보라색 옷을 입은 여성들이 바글바글했어요. 알고 보니 BTS 캐릭터숍이 오픈하는 날이었습니다. 외교나 관광은 지금이 호시절이에요. K팝, K콘텐츠, K푸드 덕분에 외국에서 한국은 친근하고 매력적인 나라입니다. 그럴수록 관리를 더 잘해야 해요.”

-BTS 멤버들은 국위 선양을 하고도 입대했습니다. 체육·예술 요원의 병역 특례를 축소 또는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는데.

“선수의 전성기는 약 10년으로 짧아요. 병역 특례는 그들이 중단 없이 운동을 이어갈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1973년에 도입된 제도입니다. 일부 나쁜 사례가 박탈감을 주지만, 국군체육부대 등 구체적 대안 없이 축소 또는 폐지하면 체육은 더 위축될 거예요. 군 복무를 하되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 중입니다.”

장미란 문체부 2차관이 파리 올림픽 개막을 100일 앞둔 지난 4월 17일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국가대표들을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림픽에 출전할 후배들에게

한국 엘리트 체육은 위기를 맞았다. 단체 구기 종목 중 여자 핸드볼을 빼면 축구·농구·배구 등 인기 종목이 모두 파리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선수단 규모(약 150명)는 1970년대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나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에요. 꽤 오래전부터 학교 운동부가 조금씩 무너져온 결과예요. ‘금메달 지상주의에서 벗어나자’면서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다 보니 실력이 하향 평준화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거의 모든 종목에서 이른바 식스맨(후보선수)이 없을 정도로 선수 수급이 어려워요. 개인 종목도 혼자선 기록을 낼 수가 없습니다. 역도도 제가 어떤 기록에 도전할 땐 모두가 멈추고 ‘미란이 파이팅!‘을 외치며 기를 모아주곤 했어요.”

-바람직한 해법이 있습니까.

“체육으로 국위 선양을 요구하지 않는 시대라지만 손흥민이나 김연아 선수가 국민에게 준 감동을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요? 체육계가 위축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생활 체육과 전문 체육이 함께 갈 수 있는, 한국에 맞는 체육 정책을 마련해야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요.”

-이번 올림픽 금메달 전망은?

“5~6개라고 하지만 양궁·펜싱·수영 등에서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합은 해봐야 알아요. 많이 걱정하시는데 우리 선수들이 더 선전할 거예요. 붙어 보기도 전에 기운이 빠지면 안 되잖아요. 올림픽을 위해 애쓴 시간들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기대해주시고 지켜봐주시고 응원해주시면 좋겠어요.”

-선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면.

“제가 올림픽을 세 번 경험해 보니 잘하든 못하든 늘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한 달 남았는데 어느 날은 자신감이 생기고 어느 날은 풀이 죽고 그럴 겁니다. 도망치지 않고 버티면서 지금까지 온 것만으로도 잘했어요. 조금만 더 하루하루 밀고 나가면 시합 날을 맞을 거예요. 연습한 만큼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어야죠.”

-무솽솽과 승부할 때처럼요?

“네. 여태껏 반복하며 흘린 땀, 쌓아온 것은 누가 훔쳐갈 수도 없고 사라지지도 않아요. ‘너희가 준비한 거 다 해라, 나도 내가 준비한 거 다 할 테니까’라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운동을 하면서 인내를 배웠다고 했는데, 차관으로 일하면서 배운 것이라면.

“협력하고 조율하는 법 등 너무 많아요. ‘나와 가족’만 보고 살다가 지금은 훨씬 많은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생각의 폭과 깊이, 시야도 넓어졌어요.”

-어공은 늘공과 달리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차관 이후의 계획도 궁금합니다.

“당장 내일 끝나더라도 마지막 그날까지 최선을 다할 거예요. 저는 원래 계획도 비전도 없습니다. 선수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요. 차관을 마치면 휴직 중인 용인대로 돌아가겠지요.”

장미란은 다시 태어나도 역도를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또래들이 화장할 때 탄마 가루를 묻혔고 또래들이 다이어트할 때 체중을 불려야 했지만 억울하지 않았다고 했다. 역도 그 무거운 쇳덩이가 준 혜택이 훨씬 더 크다고. 어떤 무게를 성공하고 역기를 바닥에 던질 때 기분이 문득 궁금했다. “신나죠. 나를 무겁게 한 중량과 불안까지 시원하게 내던지는 기분! 바닥에 떨어져 쿵쿵 튀는 소리까지 개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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