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사색] 침묵
2024. 6. 29. 00:01
침묵
유승도
골바람 속에 내가 있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려하지 않았으므로 어디로 가는지를 묻지도 않았다
골짜기 외딴집 툇마루에 앉아 한 아낙이 부쳐주는 파전과 호박전을 씹으며 산등성이 너머에서 십년 묵언에 들어가 있다는 한 사람을 생각했으나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바람 속에 내가 있었으므로 바람의 처음과 끝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작은 침묵들을 위하여』 (창비 1999)
마주하고 있는 사람과 나눌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을 때 우리는 곤혹을 느낍니다.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이런저런 주제를 꺼내 보지만 길고 정다운 대화로 이어지기란 참 어렵습니다. 그러니 때때로 우리는 달변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흙탕물을 받아두듯 어느 정도의 침묵이 있어야 나와 상대의 마음이 선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서로를 받아주는 일과 참는 일의 경계도 분명해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차분하게 좋은 생각 하나를 떠올린 다음 상대방에게 다시 결 고운 말을 걸 수 있을 것입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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