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44명 중 형사처벌 ‘0’…사적 제재 불지핀 밀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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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변호사의 ‘죄와 벌’] 사적 제재 논란, 왜 끊이지 않나
이 사건이 최근에 널리 회자된 이유는 일부 유튜버들이 가해자들 일부의 신상과 근황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해자 직장에 항의를 하는 바람에 가해자들이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적 제재는 근대 국가사법시스템이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국가에 독점시켜 놓고 국가로 하여금 부당한 공격에 대한 보복을 대신하며 정의를 실현하도록 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사적 제재가 만연하게 되면 힘이 센 사람은 지나치게 큰 보복을 할 수 있고 힘이 약한 사람은 적정한 보복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형벌권을 독점한 국가가 ‘제대로’ 형벌권을 행사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이다. 국가 공권력이 부패하거나 무능해서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면 사적 제재가 활개를 치게 된다는 것을 일부 아프리카나 남미 국가에서 볼 수 있다.
사적 제재 논란에도 불구하고, 밀양 성폭행 사건에 자체에 대한 사회적 공분은 크게 확산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심정적으로 호응했다. 다른 사건보다 이 경우에 더욱 그러했던 것은 당시 가해자들 중 누구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피해자가 엄청난 2차 가해를 당하는 바람에 정의가 심각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피해자에 책임 전가하며 합의 요구도
당시 수사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입건된 44명의 가해자들 중 한 명도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13명은 합의했다는 이유로 공소권 없음 결정을 받았고, 20명은 소년보호처분을 받았다. 법원에 기소된 10여명에 대해서도 담당 재판부가 결국 소년부에 보내서 소년보호처분을 받도록 했다. 말하자면 가해자들에게 가해진 가장 무거운 벌이 고작 2년간 소년원에 가는 것이었다.
이번 사회적 공분은 가해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 점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점도 겨냥하고 있다. 당시 경찰은 여중생인 피해자를 가해자들 수십 명과 한 공간에 놓고 조사를 했고, 피해자에게는 “네가 밀양 물을 다 흐려 놓았다”, “니가 먼저 꼬리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처음부터 피해자 가족이 경찰에 피해자 신원보호를 요청했는데도, 오히려 경찰이 적극적으로 언론에 신원을 자세히 알렸고 언론도 이에 따라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바람에 피해자는 주변 사람들의 수근거림에 시달렸다. 그 뿐인가. 가해자들의 부모는 “여자애들이 꼬리를 치는데 거기에 안 넘어가는 남자애가 어디 있느냐”는 식으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합의를 요구했고, 합의한 가해자들은 공소권 없음 결정으로 그 즉시 아무런 벌도 받지 않았다. 합의금은 알코올 중독이자 딸을 괴롭히던 그 아버지가 가로채 정작 피해자에게는 돌아가지 않았다. 반면 피해자는 자살을 시도했고, 자살에 실패한 이후에도 심각한 우울장애를 겪었다. 당시 600여명의 밀양 주민들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이 사건의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다고 답한 사람이 64%에 이른다는 결과가 보도될 정도였다. ‘2차 가해’라는 개념조차 생소한 시절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 때가 1954년인가, 1964년인가 싶겠지만 실은 불과 20년 전인 21세기 2004년의 상황이다.
스페인, 테러 범인에 징역 4만3924년
판사가 선고하는 형량과 시민들이 적정하다고 생각하는 형량 사이에 괴리가 생기는 것은 형사재판제도의 기본적 구조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있다. 형사절차 전반에는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헌법상 원칙과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언이 적용된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형사법정이란 피고인 쪽으로 조금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것이다. 테니스 코트에 비유하자면, 검사 쪽 코트는 복식 코트만큼 넓은 반면 피고인 쪽 코트는 단식 코트처럼 좁은 비대칭 코트라고 할 수 있다. 힘이 압도적으로 강한 국가(수사기관)가 진실을 왜곡하고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개인에게 핸디캡을 보정해 주는 것이다. 그 밖에도 엄벌을 구하는 검사와 개인의 딱한 처지를 들어 선처를 구하는 변호인 사이에서 결정해야 하는 판사의 중간자적 지위도 엄벌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양형 감각과 차이를 야기한다. 언론의 범죄 보도는 그 범죄자 인생의 최악의 순간만을 조명하게 되는 반면, 판사는 장기간 재판을 하면서 그의 좋고 나쁜 측면을 종합적으로 보게 되는 것도 양형 감각의 차이에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판사의 양형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무래도 기존 판결들의 관성의 힘이다. 양형을 할 때마다 판사들은 기존 판결들의 양형을 참조하는데, 기존 양형이 낮다고 혼자 대폭 높은 형량을 선고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자기 혼자 높은 양형을 하는 것은 독선처럼 느껴지고, 당사자 입장에서 어떤 판사 만나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자체가 정의에 반할 수 있는 데다가, 그런 판결을 내리면 항소심에서 파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형사재판에서는 피고인이 사실 관계를 다툴 때 피해자가 증인으로 출석하는 것 외에, 피해자를 피해자의 자격으로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니 피고인이 자백하는 사건에서는 판사가 피해자를 만나보지도 않고 형량을 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피고인이 다투는 사건에서 피해자가 증인으로 나온 경우에도 증인 신문이 다 끝났을 때 판사가 기회를 주면 잠시 소감처럼 말하는 것이 전부다. 검사가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한다지만, 검사가 건조하게 말하는 것과 피해자 본인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은 판사의 마음에 일으키는 파장의 크기가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근대 형사재판이 피해자를 참여시키는 제도를 필수적으로 두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피해자의 참여를 인정하게 되면 재판 결과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흐르거나 피해자에게 휘둘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양형 기준을 구체화하고 재판 진행을 적절히 하는 등 다른 방식으로 보완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법정에 별도의 피해자 석을 놓아두고 피해자를 정식으로 초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피해자가 정식으로 출석하면, 피고인이 법정이라는 공식적인 장소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치유를 얻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잘못한 사람에게 잘못한 만큼의 처벌을 가해지는 것이 정의다. 그래야만 가해자도, 피해자도 억울하지 않다. 필자도 변호사로 일하고 있지만, 무조건 의뢰인의 잘못을 감추어주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것 이상으로 억울하게 처벌받지 않도록 하는 일을 한다.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을 계기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잘못한 사람이 잘못한 만큼 처벌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는다. 그런 ‘죄와 벌’의 양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면, 한 순간 대충 묻고 지나간 것처럼 보이는 사건이라도 한참 세월이 흐른 뒤 끝내 부작용이 생길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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