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개업한 ‘제비’ 다방, 그 주인은 시인 이상이었다
━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끝〉 종로의 다방
바다없는 항해에피곤한
무리들 모여드는
다방은 거리의 항구
인용에서 시인은 다방을 고단한 삶의 여정에 지친 무리들이 모여드는 항구에 비유하고 있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주머니를 턴 커피 한 잔에 고달픈 생각을 위로하는 공간이라고도 한다. 시에 나타난 것처럼 당시 다방은 한편으로 암울한 굴레와도 같았던 식민지 현실, 다른 한편으로 부모·가정·사회라는 일상의 속박에 지친 젊은이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공간이었다.
채만식 역시 1939년 7월 잡지 『조광』에 발표한 글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다.
활짝 단 가스난로 가까이 푸근한 쿠션에 걸어앉아, 잘 끓은 커피 한 잔을 따끈하게 마시면서 아무것이고 그때 건 명곡 한 곡조를 듣는 그 안일과 그 맛이란 역시 도회인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의 낙인 것이요.
길을 걷다가 다방에 들르면 커피와 더불어 포근한 자리와 우아한 음악이 반겨준다는 것이다. 앞선 이용악의 시에서 다방을 고단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항구라고 비유한 것과 겹쳐지는 부분이다.
칼피스·소다수·포틀랩 등도 팔아
먼저 문을 연 다방이 있었다는 게 밝혀짐에 따라 빛이 바랜 바 있지만, ‘카카듀’는 조선인이 처음 개점한 다방으로 주목 받아 왔다. 그런데 그런 주목도에 비해서 정작 알려진 바는 적고 위치와 시기마저 정확하지 않은 듯하다. 대부분의 학술적 논의에서 다방이 문을 연 시기를 1927년이라고 하지만. 1928년 9월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개업 시기는 1928년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듯싶다. 위치는 지금의 관훈동인 관훈정(寬勳町) 초입에 우뚝 서 있던 3층 벽돌집 가운데의 1층 자리였다고 한다. 지금으로는 최초의 우체국으로 보존되고 있는 우정국의 맞은편 부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카카듀의 주인은 영화 ‘심청전’ ‘춘희’등을 감독하는 등 초기 영화계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했던 이경손이었다. 그런데 이경손만큼 주목을 받는 인물은 카카듀의 카운터를 지켰던 현앨리스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하와이로 이주했던 현순 목사의 딸이었는데,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일을 도왔던 아버지를 도우면서 역시 그쪽 일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카듀는 김진섭·이선근·유치진·정인섭 등을 구성원으로 했던 ‘해외문학파’와도 인연이 깊었다. 카카듀라는 이름 역시 김진섭과 이선근이 대화를 나누다가 지었다고 한다. 입구에 간판 대신 붉은 칠을 한 박을 건다든지, 가면(假面)을 이용해 내부 장식을 한 것은 정인섭의 솜씨였다. 그런데 카카듀는 생각만큼 영업이 시원찮았는지 수개월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멕시코’는 1929년 11월 김인규가 문을 연 다방이었다. 덕흥서림 옆인 옛 낙원회관 맞은편이었는데, 지금으로는 종로타워와 YMCA의 사이 정도 된다. ‘멕시코’는 당시로는 물론 지금으로 봐도 눈에 띄는 외관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는데, ‘멕시코’라는 희고 큰 간판 위에 커다란 물주전자를 매달아 놓은 모습이 그것이었다.
내부를 장식하는 데는 구본웅·도상봉·안석주 등 김인규의 지인들이 도움을 줬다고 한다. 벽은 헌 마대조각으로 장식했고, 커튼은 염색을 한 광목을 사용했다. 벽과 커튼은 빨갛고 검은 원색을 사용해 원초적이고 이국적인 이미지를 살리려 했다고 한다. 거기에 최승희의 무용하는 사진, 영화 ‘모나리자의 실종(Der Raub der Mona Lisa)’, ‘스페인 광상곡(The devil is a woman)’ 등의 포스터를 걸어 놓았다고 한다.
이 다방 ‘멕시코’는 낙원정과 가까웠는데, 그 일대는 요릿집이나 카페가 밀집한 곳이었다. 그래서 요릿집에서 연회를 마친 손님들과 여급, 기생 등이 2차를 가기 위해 은밀히 만나는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종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다방 ‘뽄아미’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종로의 다방을 둘러보면서 ‘제비’를 뺄 수는 없을 것이다. 이곳은 ‘날개’ ‘오감도’ 등으로 유명한 시인 이상이 1933년 개업한 다방이었다. 위치는 종로네거리에서 광화문 방면으로 종로경찰서를 조금 지나서였는데, 지금으로는 종각역에서 피맛골 사이 정도가 된다. 외관은 앞쪽을 전부 유리창으로 장식해 제비를 찾은 손님들이 종로를 오가는 사람들과 전차를 볼 수 있게 했다.
이상과 막역한 사이였던 박태원이 다방 제비에 관해 쓴 글을 보면 이상은 장식도 없는 벽 중간에 그림으로 걸려 있었을 뿐 가게를 자주 비웠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 일하는 아이 ‘수영’을 두었는데, 수영은 손님이 오면 아래와 같이 응대한다.
“무얼 드릴깝쇼?”
“저… 나는 포트-랩. 자넨, 칼피스?”
“지금 안 되는뎁쇼. 무어 다른 걸루…”
“안돼?… 그럼 소-다스이.”
“그것도 안 되는뎁쇼.”
“그것두 없다?… 그럼 무어 되니?”
수영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천연스레 대답한다.
“홍차나 고-히나.”
실제 제비는 경영의 어려움 때문에 영업을 한 기간은 2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뭐가 바빴는지 가게를 자주 비웠던 주인과 커피와 홍차만을 제공했던 종업원을 보면 제비 다방이 서둘러 문을 닫은 이유를 알 것 같다.
“다방은 커피 마시는 기분을 파는 곳”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다방을 즐겨 찾았던 사람들이 ‘다방’과 ‘커피 파는 곳’을 구분했다는 것이다. 채만식은 앞의 글에서 미쓰코시백화점 식당, 명치제과는 커피를 파는 가게이지 다방은 아니라고 했다. 현민 역시 ‘현대적 다방’이라는 글에서 다방은 그냥 ‘커피만 파는 가게’가 아니라 ‘커피를 마시는 기분을 파는 곳’이라고 했다.
이를 고려하면 손님들은 커피만을 마시기 위해 카카듀·멕시코·제비 등을 찾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다방에서 아는 얼굴들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또 지인이 없으면 빅터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이나 재즈를 들으며 잠시나마 삶의 고단함이나 강퍅함을 잊곤 했다.
당시 다방이 어떤 공간이었는지 잘 보여주는 시인 이상의 글이 있다. 이상은 사람이 꿈조차 고독하다면 그것은 정말 외로운 일이라며, 다방은 고독한 꿈이 다른 사람들에게 악수를 청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덧붙인다.
그리고 저마다 별도의 의미로 천진한 꿈을 꾼다. 그리고 물건을 잃고 돌아간다. 그런 점에서 순수하고 좋으며, 그윽한 매력이 되어 언제까지나 좋아진다고 생각한다.
다방을 찾는 손님들은 물건을 잃고 돌아가지만 천진한 꿈을 얻어 가는데, 그것이 매력이 되어 언제까지나 남는다는 것이다. 글의 서두에 인용한 이용악의 시는 다방의 유연한 분위기 속에서 기약 없는 여정을 반추해 보자는 구절로 마무리된다. 이용악이 노래한 다방의 의미 역시 이상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박현수 성균관대 학부대학 대우교수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