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배의 공간과 스타일] [242] 건축의 희생양

박진배 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대학교 명예석좌교수 2024. 6. 28.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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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트라이베카의 ‘66′ 중국음식점. 스타 셰프 장조지의 레스토랑이지만 무채색의 실루엣으로 이루어진 분위기는 중국음식과 조화되기엔 무리였다.

오래전 뉴욕 트라이베카에 유명 셰프 장조지가 ‘66′라는 중국 음식점을 열었다. 오픈 파티에는 리처드 기어, 러네이 젤위거 등의 스타들이 참석하고, 직원들은 패션 디자이너 비비안 탬의 유니폼을 입었다. 인테리어는 세계적인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가 담당해서 특히 관심을 끌었다. 본인 특유의 백색 건축을 작은 규모의 실내 공간에 압축해 놓은 듯 보였다. 하지만 무채색의 실루엣으로 이루어진 분위기는 공간의 콘텐츠, 즉 중국 음식과 조화되기엔 무리였다. 찰스 임스와 해리 버토이어 디자인의 명품 의자들을 배치한 실내는 마치 오피스 가구 전시장 같았다. 차가운 금속성의 텅 빈 홀에서 파리만 날리던 이 레스토랑은 결국 일 년이 되지 못해 문을 닫았다. 건축가는 레스토랑 비즈니스의 본질을 모른 채 그럴듯한 ‘예술작품’만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마치 오피스가구 전시장 같은 뉴욕 트라이베카의 ‘66′ 중국음식점 내부. 이 레스토랑은 결국 일 년이 되지 못해 문을 닫았다.

또 하나의 예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일본의 건축 듀오 사나(SANAA)의 뉴욕 ‘플리츠플리즈’ 패션 매장이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걸로 알려진 사나는 매장의 쇼윈도를 특별 제작했다. 다른 각도에서는 불투명해지고, 매장과 정면으로만 마주쳐야 투명해지는 디자인이었다. 길을 걷다가 90도 각도에서 쇼윈도를 돌아보면 운 좋게 매장 안이 들여다보였으나 이는 지극히 적은 빈도였다. 대부분의 행인은 내부가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건물 표면을 그저 지나쳐갔다. 임대료 비싸기로 악명 높은 소호의 모퉁이에 위치했지만 양면으로 노출된 매장의 장점을 이용하지 못하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자 결국 투명유리로 교체했다.

뉴욕 소호의 ‘플리츠플리즈’ 패션매장. 모퉁이에 위치했지만 양면으로 노출된 매장의 장점을 이용하지 못하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자 나중에는 결국 투명유리로 교체했다.

이런 예들은 비일비재하다. 전문용어로 ‘건축의 희생양(architectural victim)’이라고 표현한다. 구체적인 기능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작품 이미지에 몰두하다가 공간의 본질을 망쳐버린 경우들이다. 레스토랑이나 상점을 개점하는 사람들은 많은 재산과 노력을 투자한다. 평생의 과업이자 꿈이며, 가족의 생계가 걸려 있는 경우도 많다. 이에 반해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첨가되는 또 하나의 작품 정도로 간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디자이너가 만드는 것은 물리적, 시각적 껍데기가 아닌, 라이프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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