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민심 얻고 싶다면 희생하라

이남석 발행인 2024. 6. 2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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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73
왜군 북진에 도망칠 궁리한 조정
明에 수차례 지원병 요청한 선조
홀로 격군과 군사 걱정한 이순신
왜군의 살육과 약탈 피해온 백성
전라우수영 앞바다로 진 옮긴 순신

리더에게 필요한 건 '희생'이다. 아랫사람에게 모든 걸 양보하는 리더는 존경과 함께 충성이란 '담보물'을 얻을 수 있다. 이순신이 그랬다. 민심을 살피는 데 정성을 쏟는 그에게 백성들은 충성을 맹세했다. 어쩌면 못난 왕 선조가 이를 두려워했을지 모른다. 지금 우리네 리더들은 과연 희생하고 있을까.

리더는 자신보단 아랫사람을 위해 살아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전주성을 점령한 왜군 우군의 주력부대가 북진한다는 소식에 조선 조정은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이렇다 할 대책이 없는 데다 적을 막아설 장수도 전무했기 때문이다. 도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은 물론 명나라 부총병인 양원과 유격 진우충은 모두 한양으로 도망쳐온 터라 이미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왜적 소리만 들어도 봇짐을 싸서 달아날 궁리만 하는 소위 고관대작이란 인물들이 선조에게 이렇게 권했다. "내전과 동궁은 먼저 황해도 수안으로 보내고 평양에 있는 명나라 조선군무朝鮮軍務 경리 양호陽鎬를 재촉해 한양으로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이에 따라 선조는 수차례에 걸쳐 지원병을 요청했다. 양호는 제독인 마귀麻貴 등을 이끌고 정유년 9월 3일 한양으로 들어와 작전회의를 열었다. 양원과 진우충은 본국으로 내보내고 명나라 동정군東征軍 최정예 장졸들을 투입하기로 했다.

양호는 비밀 명령을 내려 용장인 부총병 해생解生에게 철기병 3000명을 지휘하도록 했다. 또 참장 우백영 양등산楊登山의 군사 5000명, 유격장군 파새擺賽와 파귀頗貴의 군사 3000명을 주고 왜군을 막게 했다. 제독 마귀에게는 수원성에 주둔하면서 기병 2000명을 동원해 부총병 해생을 지원하도록 했다.

해생 등 명나라의 내로라하는 명장·용장·맹장 15명이 이끄는 1만여명의 정예군이 6일 밤 천안 방면으로 진군했다. 명나라 동정군은 금오평金烏坪(일명 소사평素沙坪)에 이르러 군사를 나눠 세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마침내 왜군이 나타났고 양측은 6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

모리수원은 중군中軍, 가등청정과 흑전장정은 각각 좌·우군을 맡아 조총을 난사하면서 달려들었다. 동정군은 대포로 공격했고, 철기병 3000명과 우백영의 정예부대는 쇠방망이로 왜병을 두들겨 팼다. 교전 몇시간 만에 왜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목천과 청주 쪽으로 물러났다. 이 전투에서 왜군은 수천명의 사상자를 냈고, 명군에서는 600여명의 사상자가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순신 장군은 백성의 고달픈 삶을 외면하지 않았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그 무렵, 진도 벽파진에서 왜적 수군을 물리친 이순신은 9월 9일 중양절(당시 1월 1일 설날, 5월 5일 단오, 7월 7일 칠석 등 홀수날이 겹치는 날에 지내는 명절)을 맞아 제주도에서 가져온 소 5마리를 잡아 군사들에게 먹이면서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고 사기도 진작했다. 왜적은 여전히 이순신 함대를 정탐했다. 적선 2척이 얼쩡거리다 영등포만호 조계종에게 걸려 혼쭐이 나고 도망갔다.

날이 갈수록 바닷바람이 차가워지자 이순신이 하루는 함선 위에 혼자 앉아 격군과 군사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모친이 생각나 눈물을 펑펑 흘렸다. "하늘과 땅 사이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라며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습을 본 큰아들 회薈도 몹시 가슴 아파했다.

벽파진에는 왜군의 살육과 약탈을 피해 배를 타고 피란해온 백성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중에는 만석꾼들도 있었다. 변홍주卞弘洲, 백남진白南振, 문영개文英凱, 마하수馬河秀, 정명설丁鳴說, 김성원金聲遠, 정운희丁運凞, 하응구河應龜, 유기룡柳起龍, 김굉金䡏, 김성업金成業, 김덕린金德麟, 송상문宋象文, 이희만李喜萬 등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병졸들이 겹옷도 없이 추위에 떠는 모습을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이순신에게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통제사 영감께서는 왜놈들만 토벌하소서. 소인네들이 군사들의 겨울옷과 먹을거리를 마련토록 하겠나이다."

12일에는 비가 온종일 내렸고, 13일에는 북풍이 거세게 불어와 배를 안정시킬 수 없을 정도였다. 밤사이에는 꿈을 꿨는데, 이순신은 "꿈이 무슨 징조인지는 모르겠지만 임진년에 승리하던 때와 비슷했다"고 표현했다. 왜적 수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신경을 많이 써서라기보단 이미 수읽기를 끝낸 이순신에게 승리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는 걸 암시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9월 14일. 이순신은 벽파진 건너 해남 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고 정탐선을 내보냈다. 군관 임준영이 정찰을 마치고 돌아와 보고했다. "적선 200여척 가운데 정예 50여척이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습니다. 또 적에게 포로로 잡혀 있었던 김해사람 한명을 만났는데, 왜군이 '조선 수군에게 치욕을 당했다며, 곧 조선 수군을 모조리 섬멸한 후 한강으로 올라가겠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고 합니다."

이순신은 포로가 됐던 자의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전혀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군관들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곧바로 명령선을 전라우수영에 보내 피란민들을 알아듣도록 타이른 후 급히 육지로 피신시켜라!"

이순신은 15일 밀물에 맞춰 휘하 장수들과 함께 판옥선 13척을 몰고 전라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진 뒤에는 명량해협이 있어 소규모의 조선 수군이 이를 등지고 진을 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명량鳴梁 해협은 진도-해남 간 좁은 바닷길이자 남해바다와 서해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지금의 진도대교가 있는 곳이다. 수심이 얕은 데다 조류의 속도는 초속 5m 이상으로 매우 빠르다. 게다가 바다 밑의 큰 암초들이 문지방 역할을 하면서 사람 키보다 높은 거친 물살이 생겨난다. 이 때문에 물 흐르는 소리가 20리 밖에서 들린다고 해서 우리말로 울돌목(돌이 우는 소리가 나는 바다 어귀)이라고 한다.

조수간만으로 하루에 네 번씩 큰 너울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 때문에 '울면서 (맹골수도로) 돌아가는 길목'이라는 해학적 의미의 '울돌목' 명칭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조선 수군의 판옥선 13척과 장졸 2300여명을 보존하는 것은 이순신에게는 너무도 절실한 문제였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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