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5조원 내라"…총리 '폭탄 선언'에 발칵 뒤집히더니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이중과세 안돼"
이탈리아 헌법재판소가 정부의 횡재세 방침에 제동을 건 것은 과세 기준의 위헌성 때문이다. 이탈리아 헌재는 횡재세 과세 대상에 소비세가 이미 반영돼 있어 헌법상 '이중과세 금지 원칙'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시를 계기로 주요국의 정치권을 중심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횡재세 논란에 불씨를 댕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특수상황이라고 세금 공정성 어겨선 안돼"
로이터통신은 27일(현지시간) "이탈리아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당시 횡재세를 납부했던 에너지 기업들은 정부에 환급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며 "이는 이탈리아 정부의 취약한 재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탈리아 헌재는 이날 "소비세가 반영된 초과 소득을 기준으로 다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이중과세의 성격을 띠게 된다"며 마리오 드라기 전 총리가 2022년 러시아 전쟁을 이유로 에너지 기업들에 대해 부과한 25%의 횡재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탈리아 헌재는 특히 "전쟁 등 특수 상황이라고 해서 국가의 요구가 정당화되진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탈리아 헌재는 드라기 전 총리의 후임인 조르자 멜로니 총리가 지난해 부과한 또 다른 횡재세 조치에 대해서도 위헌 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멜로니 총리는 7000여 곳의 에너지 분야 기업들을 대상으로 2018년과 2021년 사이에 신고된 평균 소득보다 최소 10% 이상 높은 2022년 소득에 대해 50%의 횡재세를 부과했다. 당시 목표 징수액은 35억 유로였다.
이탈리아의 지난해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은 7.4%다.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하지만 이탈리아 재무부 관계자는 로이터에 "아직 부과금을 납부하지 않은 기업으로부터 (추후) 징수하게 될 세금으로 환급금을 상쇄할 수 있다"며 "재정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기업 상당수는 부과금 납부를 미루고 있다. 드라기 전 총리가 도입한 횡재세의 경우에도 당초 목표액(28억유로)에 비해 8억유로 가량이 미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과거에도 이탈리아 사법부에 의해 비슷한 성격의 징벌적 세금이 취소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이탈리아 정부가 에너지 부문을 대상으로 도입한 이른바 '로빈후드' 세금은 2015년 헌재에서 "과세 기준과 방법이 불공정하며, 특정 기업들에 불합리한 부담을 준다"며 전액 무효화됐다.
횡재세는 통상 기업들이 경영 외적인 특수 상황에서 거둔 초과 이익에 대해 한시적으로 매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 가격이 폭등한 경우, 중앙은행의 통화긴축 정책으로 예대마진(예금금리와 대출금리의 차이)이 늘어난 경우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선 이미 30여년 전 폐기된 제도
유럽에선 2022년 10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최근 4년 평균 대비 20% 증가한 석유가스 기업의 초과 이익에 대해 횡재세를 부과해 유럽연대기금을 신설하기로 하면서 15개 가량의 회원국들에 확산됐다. 최근엔 유럽의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금융권 횡재세 주장이 제기되자 관련 주가가 요동치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리시 수낵(보수당) 정권이 작년 1월부터 '에너지 이익세'라는 이름으로 75%에 이르는 세금을 부과하고 있다. 내달 4일 열리는 총선에서 노동당 집권이 유력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는 에너지 이익세를 기존보다 3%포인트 올리겠다고 공약해 에너지 기업 및 노조의 반발을 사고 있다. 기업 투자 저하로 10만 개 가량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란 이유에서다.
미국의 경우 조 바이든 대통령이 2년 전 횡재세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공화당과 석유가스 업계의 반발로 무산됐다. 이미 30여년 전에 치열한 논쟁 끝에 폐지된 제도를 재도입하는 것은 소모적이란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분석됐다. 미국에선 1980년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이 인플레이션 지수에 연동된 가격 이상으로 석유 가격이 상승할 경우 최대 70%의 횡재세를 부과한 바 있다. 기한은 1991년이었다.
그러나 미국 상공회의소에 따르면 당시 횡재세로 인해 미국의 국내 석유 생산량은 평년보다 8% 감소하고 수입량은 13% 증가하는 부작용을 겪었다. 에너지 기업들이 관련 투자를 축소하는 바람에 러시아 등 신흥 산유국의 자원 무기화에 더 취약해졌다. 또한 물가상승률 대비 원유 가격이 금세 안정화되면서 실질적인 징수 규모가 미미해졌다는 판단에 따라 1988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 의해 폐지됐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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