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이면 안 되나요?[오늘을 생각한다]

2024. 6. 28.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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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지난 5월 문재인 전 대통령은 <변방에서 중심으로>라는 외교안보 정책 회고록을 펴냈다. 출판사는 “(문재인 정부 시기 외교안보 정책의) 성공과 실패 요인, 정책에 대한 공과 판단을 솔직하게 기록했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책을 펼쳐보면 남북관계 개선의 ‘실패’에 대해서는 그다지 솔직해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서 문 전 대통령은 강한 국방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은 이것이 ‘이중사고의 모순’을 드러낸다고 비판한다. 한편에선 역대 여느 정권보다 막대한 국방비 예산(5년간 290조원)을 지출하거나 한·미 연합훈련을 진행하고, 다른 한편에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선전하는 이중성을 지적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군비를 증강하는 상대와 평화군축 협상을 하는 바보는 없다.

문재인 정부 참모들은 2019년 2월 하노이에서의 북·미 회담이 ‘노딜’이라는 파국적 상황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고, 이에 대한 플랜B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미 연합훈련을 재개하자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어버렸고, 2020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와 함께 더 이상 남한 정부의 말을 신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후 남북관계는 심각한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러니 윤석열 정부 시기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남북관계를 남 얘기하듯 할 순 없다. 이런 파국적 상황을 놓고 볼 때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완전히 실패했다. 문재인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의 논지가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무수히 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변방에서 중심으로’라는 제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문 전 대통령은 자신의 외교정책이 대한민국을 ‘변방’에서 ‘중심’으로 우뚝 세우는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한데 우리는 왜 ‘변방’에서 ‘중심’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비단 정치인들만의 사고방식은 아닐 것이다.

변방을 가치 있게 만드는 여정 대신 중심으로 진출하려는 욕망이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낫게 만들 수 있을까? 변방에서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여정이 더 필요한 건 아닐까?


1980년에 결성된 독립영화 제작집단 ‘서울영상집단’은 1996년 <변방에서 중심으로>라는 책을 통해 사회운동과 함께해온 한국 독립영화의 짧은 역사를 정리한 바 있다. 이 유명한 책 제목대로 1980년대 한국 영화의 정신에 불을 지폈던 사회 비판적인 주제 의식은 주류 영화시장으로 옮겨졌다. 한동안 영화시장의 투자가들은 ‘비판 정신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돈이 되는군’이라고 평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한국 독립영화는 거의 소멸했거나, 상업 영화로의 징검다리로 인식되고 있다. ‘변방’이라서 더 날카로웠고, 중심마저 흔들 수 있었던 존엄은 과거보다 희미해졌다.

조선 말기 실학자들이 중화사상을 넘어 “우리도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여기기 시작한 것은 사상적 진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근대적 주체를 형성하는 새로운 욕망의 담론을 낳았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중국의 지식인들이 서구식민주의 담론을 내면화함으로써 피식민자로서 식민주의자를 흉내 내기 시작했듯,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한국의 주류 담론은 언제나 세계의 중심이 되길 갈망하고, 각종 ‘K담론’을 내세우며 ‘국뽕’ 감정을 자기화한다. 하물며 평화를 포기하고 ‘전쟁 장사꾼’이 되려는 욕망이 찬양받는 사회니 두말할 나위 없겠다.

변방을 가치 있게 만드는 여정 대신 중심으로 진출하려는 욕망이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낫게 만들 수 있을까? 변방에서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일, 우리 안의 변방을 돌보는 여정이 더 필요한 건 아닐까?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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