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를 버리지 못하는 베트남[가깝고도 먼 아세안](32)

2024. 6. 2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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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0일 또 람 베트남 국가 주석(오른쪽)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환영 대회에 나란히 참석해 있다. / Vietnamtimes


지난 6월 20일 새벽 2시. 늦은 시간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국빈 방문이었음에도 21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베트남에 머물렀다. 본래 1박2일 일정으로 6월 19일 도착 예정이었던 푸틴의 늦은 방문을 두고 일부 언론은 ‘지각 대장 푸틴’이라고 부정적인 기사를 내보냈다. 하지만 이는 푸틴 초청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강력 반발에 ‘24시간도 머물지 않았다’는 외교적 제스처를 취할 수 있도록 푸틴이 베트남을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머문 시간은 짧았지만 러시아는 실리를 잔뜩 챙겨갔다. 푸틴은 베트남 권력 서열 1위인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부터 2위 국가주석, 3위 총리, 4위 국회의장까지 각각 별도 회담을 통해 베트남 핵심 지도부 모두를 만나는 큰 환대를 받았다. 빡빡한 일정 속에 베트남과 12개 협력 문서에 서명까지 했다. 미국 주도로 러시아 고립 작전이 한창인데 베트남이 푸틴의 체면을 제대로 살려준 것이다.

2023년 3월 국제형사재판소가 푸틴을 전쟁범죄 피의자로 특정해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미국과 유럽이 대(對)러시아 제재를 가하며 압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이 푸틴을 국빈으로 공식 초청한 것은 매우 도발적인 일이다. 특히나 최근 베트남은 유럽연합(EU)과 FTA가 발효되면서 무역 규모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또한 지난해 9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고 ‘포괄적·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외교관계를 격상까지 한 상황이다. 주베트남 미국대사관은 성명문을 통해 ‘어떤 나라도 푸틴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기회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며 푸틴의 베트남 방문에 불쾌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표했다. 하지만 베트남 외교부 장관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매우 정중하고 친절하며 사려 깊게 환대한 성공적인 방문’이었다고 푸틴의 국빈 방문에 대해 자평까지 했다. 도대체 베트남에 러시아는 어떤 존재이길래 이렇게 적극적으로 러시아 챙기기에 나선 것일까?

역사적 관점: 혈맹 러시아


흔히 베트남전쟁이라 부르는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1955~1975) 당시 러시아 전신인 소련은 베트남에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쟁 중에도 소련은 베트남 군관, 기술자, 과학자 등 수 많은 유학생을 받아들이며 인재 양성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래서 현재 군, 정계, 재계, 학계 등 베트남을 움직이는 엘리트 중 상당수가 러시아 유학파들이다. 지난 6월 20일 오후 베트남 국가 권력 서열 1위인 응우엔 푸 쫑 당서기장은 푸틴과 회담에서 “러시아에서 유학하며 지냈던 나를 비롯한 베트남인들은 그 시절을 항상 기억한다. 우리는 러시아 친구들과의 따뜻했던 관계를 항상 생각한다”며 러시아에 대한 우정을 아낌없이 쏟아 냈다.

1970년대 소련에 유학 중이던 베트남 유학생들/Vietnamenews


이날 저녁 국가 서열 2위인 또 람(To Lam) 베트남 국가주석은 러시아 유학 출신 베트남인 400여명과 함께한 푸틴 대통령 환영 콘서트에서 “옛 친구 한 명이 새 친구 두 명보다 낫다”라는 러시아 속담을 인용하며 애정을 드러냈다. 최근 베트남이 미국, 유럽과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러시아와는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며 국제적으로 고립된 러시아를 달래준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 내에서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존재한다. 싱가포르 정부 산하 동남아연구소인 ISEAS의 베트남 선임연구원이자 베트남 외무부 정치협력부국장까지 지낸 호왕 티 하(Hoang Thi Ha)는 “오랜 친구에 대한 우정으로 얻게 되는 이익이 적다”고 잘라 말했다. 호왕 티 하 선임연구원은 ISEAS가 발간하는 동남아 지역 분석 사이트 <풀크럼>(FULCRUM)을 통해 “2023년 베트남과 무역 규모 36억달러에 불과한 러시아를 환대함으로써 1110억달러 규모의 미국, 720억달러의 EU와 갈등을 빚으며 얻을 이익이 무엇이냐”고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중국을 견제를 위해 필요한 러시아


호왕 티 하 연구원의 해석과 달리 베트남의 러시아 환대에는 국운이 걸린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 바로 베트남이 중국과 갈등을 겪고 있는 동해(남중국해)에서 러시아가 중국 편을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러시아는 중국을 견제하고 압박하며 베트남 편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입지가 좁아진 러시아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 곳이 중국이다. 그러다 보니 베트남 지도부 입장에서는 러시아가 친중으로 돌아서지 않을까 크게 우려하는 것이다.

1981년 베트남과 러시아는 비엣소브페트로(VietSov-Petro·베트남 소비에트 석유)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1986년 6월 처음 석유를 채굴해 지금까지 총 2억5000만t(약 890억달러)의 원유를 확보했다. 푸틴이 베트남을 방문한 6월은 바로 양국의 협력으로 처음 원유를 확보한 날을 기념한 것이기도 하다. 베트남은 러시아와의 에너지 합작 기업을 통해 중국과 분쟁을 겪고 있는 베트남 동해에서 지속적으로 유전 개발을 하고 있다. 제아무리 중국이라지만 러시아 지분이 있는 유전을 함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베트남은 러시아가 꼭 필요하다. 작게는 러시아와 공동 개발하는 유전의 문제이고, 근본적으로는 베트남 동해에서 중국의 물리적 공격을 사전 차단하기 위함이다.

중국은 푸틴의 베트남 방문 소식을 짧게 보도하면서도 모든 사항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앞서 도이체벨레(DW)는 베트남이 러시아로부터 최신 전투기와 초음속 순항미사일 ‘브라모스’를 구매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베트남 군사력이 커질수록 불편한 곳은 중국이다. DW는 2023년 3월 베트남 재무부에서 유출된 문서를 근거로 베트남이 석유 시추 대금에 무기 구매대금을 녹여서 비밀리에 무기를 들여오려 한다고 전했다. 또한 람 베트남 국가주석은 러시아와 체결된 12개 협정 이외에 공개되지 않은 협정이 한 가지 더 있다고 밝혔는데, 이 비공개 협정이 베트남 동해에서 러시아는 ‘베트남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서명인 것으로 보인다.

푸틴이 러시아로 돌아가자마자 지난 5년간 주베트남 미국대사를 지낸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미국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가 베트남으로 왔다. 미국 백악관은 베트남이 러시아와 가까워질 것을 염려한 것이다. 크리튼브링크 차관보는 베트남 고위 당국자들을 만난 후 ‘(베트남-미국) 양국 신뢰는 사상 최고’라고 발표했다. 세계에서 가장 지탄받는 오랜 친구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오랜 친구와 사이가 안 좋지만 최근 급속도로 가까워진 새 친구와도 관계가 틀어지지 않게 절묘한 신공을 발휘하는 베트남은 외교를 참 잘한다.

호찌민 | 유영국 <베트남 라이징>·<왜 베트남 시장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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