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도 정권도 자해하는 즉흥 정책들[이철호의 시론]
인수위 110대 국정 과제에 없는
의대 증원·R&D 카르텔·킬러 문항
엄청난 홍역 치르고 결과도 참담
섣부른 정책이 레임덕 부를 수도
당 태종처럼 참모에 귀 기울이고
전문가와 먼저 충분히 토론해야
안철수 의원이 “의대 증원 1년 유예”를 계속 외치는 것은 비단 의사 출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지낸 입장에서 볼 때 의대 증원은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가 밀어붙인 정책 가운데 인수위원회가 정리한 110대 국정과제와 엉뚱하게 흘러온 게 적지 않다. 의대 증원은 아예 포함돼 있지 않다. 66번째 과제인 의료 분야는 필수·지역 의료 강화가 핵심이었고, 의대 증원과 연결하긴 어렵다. 지난해 10월부터 정부가 지방의 연봉 4억 원대 의사 구인난,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이 사회 문제가 되자 갑자기 의대 증원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여론조사에서 80% 가까운 압도적 지지를 얻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울고법이 의대 증원 쪽 손을 들어주면서도 “2000명이라는 수치가 현실적으로 제시된 것은 증원 발표 직전의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가 사실상 처음”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국정과제 76번째 분야인 연구·개발(R&D)도 마찬가지다. 자율과 창의성 중심의 기초연구 지원 확대가 핵심이었다. 윤 대통령이 지난해 6월 28일 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갈라먹기식 카르텔’을 때리자 정책 방향이 정반대로 가버렸다. R&D 예산은 전년 대비 14.7%, 4조6000억 원이나 깎였다. 카르텔이 문제라면 예산을 나눠주는 공공부문을 정밀 타격해야지 R&D 과제를 따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해온 대학·연구소·벤처까지 모두 적으로 돌려버렸다. 과학계와 벤처들 반발로 총선에도 악영향을 미치자 10개월 만에 예산을 복원시키고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라는 선물까지 안겼다.
국정과제 82번째 항목인 교육도 닮은꼴이다. 대입 제도는 미래 교육 수요와 사회 변화를 반영하여 개편하겠다는 게 핵심이었다. 지난해 윤 대통령이 “수능 킬러 문항은 우리 아이들을 갖고 장난치는 것”이라고 일갈하자 킬러 문항 때려잡기가 교육 지표 1순위가 돼 버렸다. 국민의힘이 “윤 대통령은 입시 관련 수사를 많이 한 입시 전문가”라고 추켜세웠지만, 결과는 참담하다. 지난해 수능에 킬러 문항이 사라진 대신 준(準)킬러 문항이 대거 등장했다. 2012년 이후 12년 만에 전 영역 만점자가 딱 한 명뿐이었을 만큼 ‘불수능’이었다. 더 기막힌 것은 사교육과 재수생이 역대급으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지난 6월 모의평가에 지원한 졸업생 수는 15년 만에 최대인 8만8698명이나 됐다. 의대 증원도 영향을 미쳤지만, 올해 2월 고교 졸업자 수가 약 3만6000명 감소한 것과 정반대다. 반수생 유입이 본격화되는 9월 모의평가에는 졸업생 지원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한국은 세계 10위권 국가다. 어떤 사안이든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즉흥적으로 정책을 결정할 시대는 지난 지 오래다. 윤 대통령은 그동안 건설폭력(건폭)·의사·과학계·사교육 등을 때리며 단기적으로 국정 지지도가 올랐다. 검찰의 특수수사처럼 상대방을 카르텔로 몰거나 악마화하면서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게 공식처럼 됐다. 하지만 길게 보면 숱한 후유증을 남긴 채 지지 기반을 허무는 ‘뺄셈 정치’가 됐다. 윤 대통령은 대선 출마 무렵 “정권 교체하러 나왔지, 대통령 하러 나온 사람이 아니다”고 했다. 그 말이 씨가 되는 게 아닌지 두렵다.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은 위험하다. 대통령은 실험하는 자리가 아니다.
의대 증원이나 R&D 예산, 킬러 문항 등은 즉흥적으로 튀어나온 정책들이나 다름없다. 전문가들과 충분히 토론한 뒤 결정했다면 그렇게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힘이 있는 정권 초엔 삐걱대더라도 관성의 법칙이 작용한다. 하지만 임기 반환점이 다가오고, 국정 지지율은 20%대 중반이다. 사소한 정책 실패라도 자칫 레임덕으로 가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중국 최고의 황금기를 연 당 태종은 ‘정관정요’에서 “천하를 얻는 창업보다 교만과 방종에 빠지기 쉬운 수성(守城)이 더 어렵다”고 했다. 그의 위대함은 스스로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한 데 있었다. 신하들과 토론했다. 윤 대통령도 참모들 의견에 귀 기울이고, 낮추고, 비웠으면 한다. 하지만 어느새 용산 대통령실에 참모는 사라지고 비서만 판친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임기가 2년 10개월이나 남았는데,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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