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구 취미[살며 생각하며]
만년필 몽블랑 마이스터슈튀크
애호가들 사랑 속 생산 100년
필기구 뒤안길로 들어섰지만
즐기는 이 많아 200년도 기대
의식주에 사치 부리면 해악이
문방구에 사치 부리면 품격이
만년필을 사랑하는 애호가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제품이 몽블랑 마이스터슈튀크이다. 그 컬렉션이 처음 생산된 해가 1924년이니 올해로 꼭 100년이 된다. 그동안 미세하게 바뀐 부분이 있기도 하고, 파생된 제품도 적지 않게 나왔다. 하지만 기본 형태는 큰 변화 없이 생산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인기 있는 상품으로 팔리고 있다. 이를 기념하여 회사에서도 100주년 기념 제품을 다양하게 출시하였고, 이와는 별도로 화려한 기념식을 한 달 전에 열기도 하였다. 여러 언론에서도 그와 관련한 기사를 쏟아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 문방구 제품 하나가 여러 신문에 기사로 등장하기는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내 주변에도 마이스터슈튀크 146과 149를 사용하는 사람이 꽤 있다. 나는 146 만년필 두 자루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30년 전에 선물 받은 것이고, 하나는 작년에 부상으로 받은 것이다. 공교롭게 두 자루 모두 선물로 받은 물건이다. 앞의 만년필은 거의 20년 동안 줄곧 사용하여 여기저기 긁힌 흠집이 나고 낡기는 하였으나, 펜촉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잘 써진다.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노브를 교체한 사고가 있기는 해도 필기구 가운데 가장 오래 내 곁을 지키고 있다. 뒤의 만년필에는 상(賞)의 명칭이 각인되어 있어 잉크 한 번 넣지 않은 채 서랍에 고이 보관하고 있다.
그사이에 필기구에 취미가 붙어 여러 회사의 제품 여러 가지를 써보았다. 워터맨과 라미, 그라폰파버카스텔, 셰퍼, 펠리칸, 세일러 등에서 나온 만년필이다. 잉크도 검은색에서 파란색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파란색 잉크 위주로 쓰되 필요에 따라 붉은색과 노란색 계통을 함께 쓴다. 종이와 노트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쓰다가 마음에 드는 종이를 만나 아예 노트를 만들어 쓰기도 한다. 만년필의 가격은 몇만 원에서 몇백만 원에 이르는 것까지 천차만별이다. 펜촉의 느낌은 각양각색이라서 회사마다 펜마다 다르니 묘미가 있다. 필감의 차이를 넘어서 펜의 소재와 형태는 저마다의 개성을 지녔고, 공예품의 한 영역에 들어간다.
필기구를 다양하게 갖춰 쓰는 애호가라면 그 물건을 아끼는 변명이 없을 수 없다. 필기구 소비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래전에 18세기 문인 유만주(兪晩柱)의 방대한 일기 ‘흠영(欽英)’을 통독하다가 1780년 6월 15일 자 가운데 한 대목을 읽고 쾌재를 부른 적이 있다.
‘저택에 사치를 부리면 귀신이 엿보고, 먹고 마시는 데 사치를 부리면 몸에 해악을 끼치며, 그릇이나 의복에 사치를 부리면 고상한 품위를 망가뜨린다. 오직 문방구에 사치를 부리는 것만은 호사를 부리면 부릴수록 고상하다. 귀신도 너그러이 눈감아 줄 일이요 몸도 편안하고 깨끗하다.’
이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에 쏙 들게 대변하는 말이다. 의식주에 사치를 부리면 좋지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하므로 절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문방구 사치는 큰 해악 없이 하면 할수록 고상한 품위가 절로 생긴다. 유만주도 붓과 벼루·종이·연적 같은 문방구에 못 말리는 취미를 가졌음이 분명하다.
몇십억, 몇백억 하는 저택은 꿈도 꾸지 못한다. 비싼 술과 좋은 음식을 찾아다니는 탐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몇천만 원, 몇억 원을 호가하는 명품 가방과 시계를 가지고, 옷을 걸치는 과시욕도 아니다. 그에 비하면, 문방구 사치는 조금 지나치더라도 경제적으로도, 건강에도, 품위에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대부분 애호가는 절제하지 않고 사치를 부려도 괜찮다. 18세기의 ‘소확행’ 선비쯤 되는 그의 말은 필기구 취미의 철학을 멋지게 표현하였다. 공감하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글을 많이 쓰는 직업을 가졌다. 평상시에 자판으로 글을 쓰기는 하지만 메모나 교정, 필기와 같은 많은 사무에는 만년필을 많이 사용한다. 스마트폰의 사용이 보편화하면서 필기구를 사용하는 인구가 급격하게 줄었다. 너무 큰 변화이기는 하지만 필기구의 역사에는 그런 큰 변화가 작지 않았다. 유만주가 그렇게 사랑했던 문방구 가운데 현재 널리 쓰이는 것은 없다. 옛날에는 글을 쓰는 모든 사람 손에 붓이 쥐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특별한 취미가 있는 일부 사람만이 붓을 사용한다. 정말 멋진 명품 옛 벼루가 골동품으로서 가치도 떨어져 헐값에 팔리기도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만년필도 필기구의 유행에 완전히 뒤처져 저 붓이나 벼루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요즘 누가 만년필로 글씨를 쓰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으니 필기구의 뒤안길로 벌써 들어섰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실용적 목적 외에 여러 이유로 만년필로 글씨를 쓰는 이가 적지 않아 반갑다. 페이스북에는 ‘만년필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동호인 모임이 있는데 한때 나도 이름을 걸어놓고 만년필을 즐기는 애호가들의 모습을 엿보았다. 이 모임은 인원이 그리 많지 않다. ‘문방삼우’ 등 곳곳에 큰 규모의 동호인 모임이 있어 활발하게 활동한다. 만년필 애호가들이 각자의 안목과 미감으로 아끼는 만년필과 그 만년필로 쓴 개성이 있는 필체를 보면 쉽게 사라질 문화는 아닌 듯하다. 몽블랑 마이스터슈튀크가 다시 100년을 이어가 200주년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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