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인강에서 자료 위주 현강으로"…패러다임 바뀐 '수능'
사교육계 종사한 의사·소설가가 쓴 문제작…'수능 해킹'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지방 수험생 입장에서는 (이 상황을 알면) 내 3년은 대체 어디로 갔냐'하는 느낌이 들 수 있죠. 저희가 본 건 항상 '수학의 정석'이랑 '센수학'이랑 '자이스토리'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가 재수하면서 서울로 왔는데 다들 실전모의고사를 너무 편하게 쓰고 있는 거예요…그러니까 서울이랑 지방이랑 아예 접근 자체가 달라요."
N수생인 이모 씨가 서울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준비하며 한 말이다.
작년 수능 만점자는 서울 강남의 A학원 출신이었다. 표준점수가 가장 높아 전체 수석을 차지한 이도 이 학원에서 재수를 한 학생이었다. A학원은 2014년 수능이 언어영역·수리영역·외국어영역에서 국·수·영으로 개편되면서부터 발전하기 시작해 2020년대는 B학원을 제치고 부동의 1위 학원이 됐다.
A학원이 유명해진 건 '실전모의고사' 덕택이 컸다. 실전모의고사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하는 3·6·9월 모의고사 및 수능과 완벽히 동일한 형식으로 제작되는 문제를 말한다.
2000년대 들어 수능 문제를 예측하고, 만들어보는 놀이문화가 수험생 커뮤니티에서 유행했다. '숨마쿰라우데'같은 문제집은 이런 커뮤니티 활동의 산물이었다. A학원은 커뮤니티에서 이른바 '1타'로 유명한 이들을 대거 스카우트해 자체적인 콘텐츠팀을 만들었다. 콘텐츠팀이 엄선한 문제들이 실제 수능과 모의평가에서 높은 적중률을 보이면서 학원의 명성이 올라갔다. 일종의 놀이문화가 주류문화로 편성되는 과정에서 A학원이 부상한 것이다.
실전모의고사 유행의 뒤꼍에는 평가원이 있었다.
수능이 나온 이유는 암기 위주의 학력고사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즉 "지식 암기 평가에서 벗어나 분석적 사고와 추론 능력을 검증"하는 데 있었다. 수능 초기에 'IQ 테스트 아니냐'는 일각의 비아냥이 있었지만, 신선한 문제로 주목받기도 했다.
가령 김성열 평가원장이 주도한 2009년부터 2011년 수능은 발상과 논리력 면에서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교육계에선 비슷한 문제를 아예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유사 문항을 수백개씩 풀어 접근법을 외우는 대비법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러나 2011년 수능이 '역대급 불수능(어려운 수능)'으로 보도되면서 김 원장은 도중하차했다.
늘 난이도 조절이 문제였다. 쉽든 어렵든 평가원은 구설에 올랐다. 역대 평가원장 11명 중 3년 임기를 무사히 채운 이는 고작 3명에 불과했다. 8명은 수능 후 논란으로 중도 사퇴했다. 1등급 합격선이 100점에 가까우면 '물수능(쉬운 수능)', 80점대 초반이면 '불수능'으로 욕을 먹어야 했다. 공무원 조직인 평가원이 살아남는 길은 욕 먹지 않게, 적당히 난이도를 조절하는 것이었고, 이는 "사교육과의 적대적 공생"을 함으로써 가능했다.
평가원은 2017년부터 2021년도까지 5년간 자연 계열 수학 1등급 합격선을 92점으로 맞추는 신기를 발휘했다. 심지어 2012년부터 2014년 인문계열 수학 과목 만점자 수를 1% 근방에 맞춰놓는 "기예"를 펼치기도 했다. 이는 "난이도를 거의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라고 문호진 씨와 단요 씨는 신간 '수능 해킹'에서 말한다. 이들은 의사와 소설가지만 실전모의고사와 사설모의고사를 여러 차례 출제하는 등 사교육계에서도 일했다.
저자들에 따르면 2010년대 들어 수능 문제는 패턴화됐다. 예전처럼 암기지식은 아니지만 '생각하는 법'을 암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가령 정육면체 큐브를 처음 접한 사람은 실마리를 잡는 데 오래 걸리지만, 숙련자들이 원상복구 하는 데는 1분이 걸리지 않는다. "사고력이나 논리력 자체는 암기의 대상이 아닐지라도 논리 흐름과 접근법을 외우는 것은 가능하다"는 얘기다.
실제 수능은 문제 자체가 초기보다 어려워졌지만 '사고의 패턴'을 분석하면 빨리 풀 수 있는 문제들로 변질했다. 국어의 경우 문장 구성, 문단과 문단의 구성, 논리 전개 등이 이미 노출됐다. 지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글자의 형태만 분간하면 풀 수 있는 "퍼즐식" 시험으로 변모했다.
수학은 2019년 가형 30번, 2021년 가형 30번, 2023년 미적분 30번이 "미분을 이용해 그래프 개형을 추론하는 풀이법 면에서 완전히 동일"했다. 2년에 한 번씩 소위 가장 어렵다는 '30번 킬러 문제'가 실질적으로 같았던 것이다. 사교육계가 "빤히 보이는 샛길"을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발 빠르게 수능과 유사한 유형의 실전모의고사를 만들었고, 이는 적중했다.
"저는 근본적으로 사교육이 대응할 수 없도록 문제 출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제가 뻔하게, 사교육 실전모의고사랑 똑같이 나오는 것부터 잘못된 거예요." (강사 O씨)
저자들은 사교육 시장의 작동 방식, 공교육의 한계와 가능성, 사교육의 고도화가 불러온 전례 없는 양극화, 학종의 한계 등 다양한 교육 문제를 심사숙고해 가며 분석한다. 아울러 교육 데이터의 상세한 공개, 민주적 의사소통 강화 등 여러 대안도 모색한다.
그러나 뾰족한 해답은 없어 보인다. 책을 읽고 나면 한국식 '줄 세우기' 문화가 전면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입시정책이 바뀌더라도 '실질'이 변모할 수 있겠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옛날 시험은 인재를 얻으려는 방법이었지만, 오늘날의 시험은 그 반대다. 어릴 때부터 시험 보는 방법을 가르쳐서 몇해 내내 그것만 생각하게 만들면 그 후로는 병을 고칠 수 없다. 운 좋게 시험에 붙으면 그날부로 배운 바를 모두 잊는다."
18세기 실학자 박제가가 저서 '북학의'(北學議)에 쓴 글이다. 어제 어느 교육평론가가 수능을 비판하며 썼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듯한 내용이다.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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