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주의에 빠진 세계… 해법은 ‘아웃사이더의 사고’ [북리뷰]

2024. 6. 28.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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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물결
미치코 가쿠타니 지음│김영선 옮김│돌베개
전쟁·정치양극화·인종차별 등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닮아
불평등 상징 19C ‘美도금시대’
독립지식인 저항 있었기에 끝나
제도·조직 밖 ‘혁신적 생각’ 이
위기 탈출·번영 만드는 원동력
게티이미지뱅크

1831년 일본 화가 호쿠사이는 우키요에 한 점을 그렸다. 화면 왼쪽부터 집채만 한 파도가 일어나서 끝없이 밀려들고, 거센 물결 사이로 배 세 척이 가라앉을 듯 흔들리는 가운데, 어부들은 배 바닥에 납작 붙어서 불안에 떨고 있다. 그림 제목은 ‘가나가와의 파도 아래’. 오늘날 이 그림은 ‘거대한 물결’이라는 별칭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변주되는 이미지가 되었다.

‘거대한 물결’에서 미치코 가쿠타니는 오늘날 전 인류가 가나가와 어부들과 같은 불안에 휩싸여 있다고 말한다. 정치, 경제, 기술에서 일어난 격변이 우리의 안온했던 일상을 압도하면서 모든 걸 위협하고 있다. 근대화 물결 앞에서 호쿠사이가 느꼈던 불안은 이제 인류 전체의 감정이 되었다. 코로나19의 대유행,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극우 포퓰리즘 세력의 유럽 장악 등 우리가 알던 세계가 이토록 빠르게 무너지는 중이다.

가쿠타니는 뉴욕타임스 서평 기자이자 퓰리처상 수상자로 수십 년간 미국 출판계를 이끌어왔다. 이 책에서 그녀는 수많은 기사와 책을 인용하고, 문학과 현실을 넘나들면서 이 시대의 종말론적 풍경화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우익 포퓰리즘 등장과 정치 양극화, 권위주의 정권 발흥과 민주주의 위기, 사회적 고립 확산과 불평등 심화, 인공지능(AI) 발달에 따른 잠재적 재앙, 기후변화가 가져올 파국 등 불안의 증거는 널려 있다. 산업화가 극단적 불평등으로 이어진 19세기 말 미국 도금시대, 사회 불안이 히틀러 등장을 가져온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유럽과 비슷하다.

100년 전 세계도 지금처럼 붕괴 위기였다. 산업화가 가져온 번영의 과실을 극소수가 독점하면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만연했다. 선동가가 등장하고 포퓰리즘이 일어나면서 반이민 열풍이 불고 흑인 등 소수자 권리가 후퇴했다. 암울함에 절망한 이들은 히틀러 같은 극단주의자의 목소리에 빠졌다. 사태를 이성적으로 해결하는 대신 사람들은 파멸로 향하는 길에 몸을 던졌다. 그 결과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비슷한 목소리를 곳곳에서 들을 수 있다. 반이민, 소수자 억압, 인종 차별, 혐오 범죄, 법치 부정, 음모론, 독재 옹호,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 등 반이성주의가 세계를 휩쓴다. 미국은 음모론에 파먹히고, 중국과 러시아는 독재의 손아귀에 사로잡혔으며 유럽은 점차 극우 세력에 점령당하고 있다. 기술 발달은 외려 사회 재앙의 촉매가 되었다. 특정 취향의 정보만 반복 노출하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세계를 접하면서 공동 감각이 약해지고, 부족 정체성은 강화되며 확증 편향이 퍼져갔다. ‘유튜브 민주주의’ ‘좋아요 민주주의’는 극단주의와 동의어이다. 선거를 부정하고 폭동을 선동한 트럼프 같은 불량 행위자가 또다시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의 대통령이 될 위기에 처했다는 게 그 구체적 증거이다.

그러나 가쿠타니에 따르면, 혼란과 불안을 초래하는 대붕괴 시대, 역사가 불안정하게 유동하는 막간의 시대는 이행기의 특징이다. 흑사병 위기가 봉건 제도를 해체해 자본주의 시대를 열었듯, 대공황과 파시즘 위기가 뉴딜 정책을 가져오고 복지 국가 건설로 이어져서 민주주의 번영을 열었듯, 세계화와 기술 발전, 신자유주의 실패와 권위주의 확산이 일으킨 위기의 물결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럴 때 중요한 게 전통의 제도 및 조직의 틀 밖에서 작동하는 아웃사이더 사고다. 도금시대를 끝낸 것은 노동조합의 끈질긴 저항과 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폭로하는 데 앞장선 업턴 싱클레어 같은 독립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처음에 변방의 아웃사이더였으나, 결국 자신들의 혁신적 사고를 사회 전체가 받아들이게 했다. 현대 예술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여성, 이민자, 유색인종 등은 주류 엘리트의 관습에 저항해 낯선 사고와 새로운 창작 방법을 퍼뜨려 예술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풍부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위기 국면에서 인류가 어떻게 아웃사이더 사고를 받아들여 희망을 이룩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미 우리에겐 그 증거가 있다. 엘리트들이 극단주의와 음모론에 빠져 불량국가를 만들려 애쓰는 동안, 시민사회에선 탈중심화되고 수평적이며 민주적인 저항 운동이 수시로 일어났다. 미국에서 트럼프 집권 4년은 시위, 불복종, 파업 등이 번성하고, 불매 및 주식 매각 운동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압박이 커지며, 노동조합 지지율이 높아지는 등 풀뿌리 민주주의가 전성기를 맞았다. 평범한 시민들이 보여준 이 놀라운 회복력은 위기를 극복하고 상처를 치유하려 할 때 우리가 내놓을 희망의 강력한 증거가 된다. 332쪽, 1만9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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