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 후손들이 독점한 ‘무관 출세길’… 왕이라도 천거 관여 못해[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2024. 6. 28. 09: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28) 무관 선호도 1위 ‘선전관청’ (2)
후보군 미리 발탁하는 제도 둬
무예 익힌 양반 한량들이 차지
선전관 선배가 직접 후보 뽑아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자리
“사사로이 임용” 문제 불거져
현종때 김좌명 탄핵 위기도
숙종땐 ‘종실 서출’ 제외 소동
천거 막은 박섬 결국 파직돼
일러스트=김유종 기자

# 무관 고위직으로 가는 출세의 지름길

선전관은 고위직 무관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출세의 요람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에 이르면 선전관은 명문가 출신들만 차지하는 자리로 변질된다. 심지어 선천(宣薦)이라는 제도까지 마련해서 명문가 후손이 선전관을 독점하도록 만들었다.

선천은 일 년에 두 번 실시하는데, 선전관 후보군을 미리 발탁해두는 제도였다. 선천의 대상은 무과의 급제자 혹은 명문가의 한량, 즉 무과 급제자가 아닌데도 무예를 익힌 양반 자제였다. 선전관에 빈자리가 생기면 선천으로 발탁한 자 중 3명을 뽑고, 왕이 그들 중에 한 명을 낙점하면 선전관이 되는 것이었다.

이렇듯 선전관은 무과 출신과 음서로 들어오는 한량 출신이 섞여 있었는데, 음서로 들어오는 한량 출신은 숫자가 2명으로 정해져 있었다. 음서로 들어온 선전관을 남항(南行, 음서로 벼슬하는 것을 일컫는데, 한자는 남행이라고 쓰고 남항으로 읽는다) 선전관이라고 하는데, 숫자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한량으로 있다가 남항 선전관이 되기 위해서는 집안의 배경이 매우 든든해야 했다. 말하자면 집안 대대로 권력을 누리고 당대에도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집안 자제라야 남항 선전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천의 방식은 매우 폐쇄적이었다. 선전관으로 천거할 땐 반드시 선전관 선배들이 직접 후보를 택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왕이라도 선전관 천거에 관여할 수 없었다. 그만큼 선전관의 위세가 대단했다.

선전관의 소임을 마친 무관들은 탄탄대로를 걸으며 고위 무관직으로 향해 가는데, 이 과정에서 선전관 선후배는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상호 보호막을 형성한다. 선전관 출신이 아닌 자들이 고위 무관직으로 올라오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이다.

# 선전관 임용 문제로 탄핵당한 김좌명

선전관이 된다는 것은 곧 출세를 보장받는 일이었기 때문에 선전관 자리를 두고 권력 다툼을 벌이는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선전관을 사사로이 임용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 사례 중 하나가 현종 8년(1667년) 10월에 있었던 지중추부사 김좌명에 대한 대간의 탄핵 사건이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중추부지사 김좌명이 사사로운 관계 때문에 허재라는 인물을 선전관으로 삼았다면서 그를 탄핵했다. 이에 대해 김좌명은 억울한 심정을 호소하며 현종에게 이런 상소를 올린다.

“대간이 아뢰면서, 낙강한 자를 선전관에 제수한 것을 가지고 신의 죄안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강서(講書)는 행하기도 하고 행하지 않기도 하여 정해진 규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허재가 사서를 강의하는 시험에서 떨어졌는데도 김좌명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를 선전관에 올렸다며 그를 탄핵했다. 이에 김좌명은 원래 선전관이 되는 자격엔 사서 강의 시험에 대한 요건이 없으므로 비록 이 시험에서 떨어졌다고 해도 선전관이 되는 조건과는 관계가 없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빈자리는 항상 부족하고 천거된 자는 항상 많았으므로 모두 다 제수하지 못하였는 바, 제수된 자는 덕 보았다고 여기고 제수되지 못한 자는 곧 나를 제쳐놓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정을 아는 자가 그런 말을 듣는다면 사세에 있어서 당연한 일로 여길 것이고, 모르는 자가 들으면 의심쩍어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비방하는 의논이 생겨난 것은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말인즉, 원하는 자는 많은데 자리는 부족하여 늘 시기와 질투가 넘쳐나서 비난이 많은 것이 당연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김좌명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는다.

“신은 번거롭게 일일이 지적하면서 아뢰어 시끄럽게 스스로 해명하는 듯이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조정에서는 끝내 어떤 사람에게 사심을 써서 어느 직에 제수하였는지 모를 것이고, 외방에서 듣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논계가 어떻게 해서 발론되었으며 또 어떻게 해서 정지되었는지 모를 것입니다. 이에 부득불 그 대강을 간략히 진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현종은 김좌명의 억울한 심정에 동감을 표하며 말한다. “사실에서 벗어난 일을 어찌 혐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이렇듯 김좌명은 가까스로 자리를 보전하게 되었지만 실록엔 선전관 임용 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난 수많은 논쟁이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선전관 자리는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던 것이다.

# 천거 문제로 억울하게 파직당한 박섬

숙종 2년(1676년) 11월 21일, 선전관 박섬이 파직되었는데, 그 사연을 살펴보면 박섬은 다소 억울한 경우였다. 이날 숙종이 경연의 낮 강연인 주강에 나가니, 종친인 완평 부수 이홍이 이런 말을 올렸다.

“종실 자손의 서파(庶派)는 일찍이 사로(仕路)에서 막힘을 당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종실의 아들로서 무과에 오른 자가 서파라고 해서 선전관의 천거에서 삭제를 당하였으므로 감히 계달합니다.”

서파란 곧 서출을 의미하고, 해당 인물은 종실의 서자인 이한주였다. 원래 서출이라고 해도 종실 출신은 벼슬에 제한이 없었는데, 이번에 선전관 선천에서 서출이라고 하여 제외됐다는 말이었다. 숙종은 14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친정을 했는데, 이때 나이 겨우 16세였다. 그런 까닭에 종친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말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숙종은 몹시 진노하여 선전관 19명을 모두 옥에 가두게 하고, 곧 천거받지 못한 3인을 천거 명단에 넣도록 했다.

그러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인의 영수 허적이 아뢰었다. “천거를 막은 자만을 옥사에 가두고, 나머지 사람은 가두는 것이 합당치 못합니다.” 이에 숙종이 허적의 말을 따랐다. 그러자 옥사에 남은 선전관은 박섬 한 명뿐이었다.

박섬을 상대로 이 사건의 내막을 신문하자, 박섬이 자초지종을 이렇게 말했다. “종실의 아들 이한주는 세루(世累, 세상의 속된 일)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등과(登科, 과거에 합격함)했을 때 국휼(國恤, 국상)을 당했는데도 화동(花童, 어린 소녀)을 끼고 문을 닫고 연락(宴樂, 잔치를 즐김)을 했기 때문에 막은 것이요, 서파(庶派, 서출)이기 때문에 막은 것은 아닙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점수가 부족하고 또한 그 문망(聞望, 명예와 인망)이 부족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그 문지(門地, 가문)가 낮다는 것이 아닙니다.”

박섬의 이 말은 사리에 맞고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린 숙종은 종실의 아들이 서출이라는 이유로 벼슬에서 제거됐다는 생각에 집착하여 박섬에게 형벌을 가하고 진상을 캐물으라고 닦달했다. 그러자 병조판서 김석주가 숙종을 만류했다. 이에 숙종은 박섬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은 중지시켰지만, 그를 파직하라고 명령했다. 숙종은 여전히 종친을 홀대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작가

■ 용어설명 - 주강(晝講)

조선 시대 군왕과 신하가 함께 공부를 하던 하루 3회의 경연(세자의 경우 ‘서연’)이 오후 시간 진행되는 경우 주강이라고 했고, 아침은 조강(朝講), 저녁은 석강(夕講)이라고 불렀다. 주강은 조강에 비해 참석 인원이 적었고 석강과는 대체로 비슷했다고 한다.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