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지 않으려던 그 피가 내 피일 수도 있었다” [책&생각]

조일준 기자 2024. 6. 28.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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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작가가 악착같이 쓴
가자 전쟁 첫 85일의 참상 기록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파괴·학살
유폐지 바깥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지난해 12월 31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알시파 병원 안마당에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숨진 희생자들의 묘지를 한 소년이 바라보고 있다. 가자시티/AP 연합뉴스

집단학살 일기
가자에서 보낸 85일
아테프 아부 사이프 지음, 백소하 옮김 l 두번째테제 l 2만2000원

도시와 마을 도처에 죽음이 깔렸다. 죽음은 하늘에서 쏟아지고 저편에서 날아온다. 밤낮이 따로 없다. 겹겹이 무너진 건물 잔해더미 아래에는 사망자 수에도 끼지 않은 채 묻혀버린 죽음이 부지기수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참상이다. 지난해 10월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기습공격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시작된 전쟁이 9개월째다. 6월24일 현재 팔레스타인 사망자만 3만7600여명, 하루 평균 140명이 넘는다. 그 대다수는 평범한 민간인, 40%는 어린이다.

‘집단학살 일기’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문화부 장관이자 작가인 아테프 아부 사이프(51)가 전쟁이 시작된 첫날부터 2023년 12월30일 남쪽 국경을 넘어 이집트로 피난하기까지 85일간 보고 겪은 일을 낱낱이 기록한 증언 문학이다. 사이프는 가자 지구의 난민촌에서 나고 자랐다. 팔레스타인에서 대학을 마치고 이탈리아에 있는 유럽대학연구소(EUI)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19년 자치정부가 있는 요르단강 서안으로 이주했다.

폭발음과 비명, 슬픔과 절망이 넘치는 일기를 읽는 것은 고통스럽다. 다른 한편으론, 생사를 넘나드는 아비규환 속에서 가족과 친구를 챙기고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려는 간절함을 읽노라면 가슴 밑바닥에서 안타까움과 미안함과 공감이 뒤섞여 올라온다. 글쓴이가 이스라엘의 철저한 봉쇄를 뚫고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 가디언, 르몽드, 슈피겔 등 서구의 유력 매체에 악착같이 일기를 기고했던 것도 “다른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리고 싶었고, 내가 죽었을 때를 대비해 사건의 기록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달 26일 밤(현지시각)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최소 35명이 숨진 가자지구 최남단 도시 라파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불길에 휩싸여 있다. 라파/로이터 연합뉴스
지난 17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남부 도시 칸 유니스의 한 마을이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가운데, 집을 잃은 한 가족이 무너진 건물 잔해더미에 앉아 있다. 칸 유니스/신화 연합뉴스

10월7일, 첫째날은 토요일이었다. 가자 지구 칸 유니스에서 열릴 팔레스타인 문화유산의 날 연설차 15살 아들과 함께 고향을 방문한 참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혈육들과 아침 수영을 즐기러 바닷가에 갔는데, 느닷없이 하늘에서 로켓탄이 쏟아지고 군함에서도 포탄이 날아왔다. “가자 주민들에게 전쟁은 날씨와도 같은 것이어서”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불과 사흘째에 도시는 “슈퍼마켓, 환전소, 과일 가판대, 향수 상점, 장난감 가게까지 모두 불타고 묻혀버렸다. (…)폐허 위를 거니는 일은 압도적이다. 피가 사방을 덮는다. (…)밟지 않으려던 그 피가 내 피일 수도 있었다.”

처제의 가족이 폭격으로 몰살되고, 유일한 생존자인 조카는 양다리와 한 팔을 잃었다. “아이들은 이스라엘의 미사일에 맞아 자신들이 조각난 뒤에도 자기 시체가 확인될 수 있도록 손발에 마커로 자기 이름을 써두고 소셜미디어에서 공유”하기 시작했다.(10월19일, 열세번째 날) 사이프는 “이건 공격이 아니라 학살”이라고 개탄한다. “동네에서 표적이 된 지역은 완전히 사라졌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11월1일, 스물여섯번째 날) “그들의 목표는 가자 지구 전체의 인종청소다. (…)저들이 청소하는 건 하마스가 아니다. 아랍인들이다. 보이는 대로 죽이거나 떠나도록 강제하거나, 둘 중 빠른 쪽으로 할 거다. 선택권은 없다.”(11월9일, 서른네번째 날)

이스라엘의 전면 봉쇄 탓에 물과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했다. 난민촌에서는 천막 하나로 추위와 더위를 견뎌야 했다.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공격은 “창문 밖으로 포탄이 공중을 날아가는 걸 직접 봤”을 만큼 시시각각 생존자들의 숨통을 조여왔다. 11월21일, 사이프 가족도 결국 피난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칠순 장인장모는 고향에 남겠다고 했다. 생이별은 일상사다. 피난길도 가슴 졸이긴 마찬가지다. 거리를 점령한 이스라엘 군인들은 행렬에게 “앞만 보고 걸으라” 위협하고 무작위로 남자와 소년을 골라낸다. 그렇게 끌려간 이들의 생사는 오직 이스라엘군만 알 터였다. 지은이는 아들에게 주변을 보지 말라고 엄하게 당부한다. “수십 구, 또 수십 구의 시체가 길 양쪽에 나뒹굴고 있었다. (…)다 타 버린 차창으로 손 하나가, 나를 꼭 집어 뭔가를 요구하듯이 우리를 향해 뻗어 있었다. 거기에는 목이 없는 시체들이, 잘린 손들이 있었다. 다시 야세르에게 말했다. ‘보지 마. 아들, 그냥 계속 걸어.’”

지난해 11월 8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지상군을 투입한 이스라엘군의 한 장교가 민간인 아파트의 집안을 수색하고 있다. 가자 시티/AP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서울 도심에서 한국에 체류 중인 팔레스타인인과 한국 시민단체들이 주최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 규탄 연대시위의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사이프는 “가자는 버려졌다”고 개탄한다. “안타깝게도 가자 시티와 북부를 절대 떠나지 말았어야 할 두 집단(기자들과 국제기구)은 이 지역을 가장 먼저 떠났다. (…)이스라엘 병사들이 마음껏 날뛰도록 내버려 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은 그들과 함께 진실도 떠나간 게 아닌지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12월17일, 일흔두번째 날)

일기는 사이프 일행이 우여곡절 끝에 국경을 넘어 이집트로 들어온 12월30일에 끝난다. 가까스로 되찾은 안도감 속에서도 그는 “남겨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하니 부끄러워졌다”며 ‘망명자의 딜레마’에 어쩔 줄 몰라한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내 모든 형제자매, 아버지, 친구들이 살아남을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일기는 지난 3월 영국에서 맨 먼저 단행본으로 나왔고, 인도네시아·미국·스페인·일본·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에서도 번역본을 출간했거나 할 예정이다. 책의 로열티 수익은 팔레스타인 지원 단체 세 곳에 기부된다. 뉴욕타임스 기자 시절 퓰리처상을 받았던 크리스 헤지스는 서문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었다. “아기 그리스도는 부서진 콘크리트 더미 속에 누워 있다. 악은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선도 마찬가지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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