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 대신 펜을 들었다, 환자를 위로하려 [책&생각]

한겨레 2024. 6. 28.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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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를 찾아서 | 강병철 번역가
소아과 전문의가 된 문학소년
캐나다 이주 뒤 번역가의 길로
환자 지침서, 감염, 장애 등
“목소리 작은 이들의 목소리 되자”
잘나가던 의사를 그만두고 캐나다에서 의학 전문 번역가로 살아가고 있는 강병철 번역가는 탁월한 번역 실력으로 번역상을 두 차례나 수상했다. 사진 본인 제공

신경림, 황동규 등의 시집을 품고 시인을 꿈꿨던 문학소년은 차마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해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신장학을 공부하며 재미를 찾고 소아과 전문의가 됐다. 같은 의대에서 만난 아내와 함께 풍광에 반한 제주도에서 소아과를 개원했다. 꼼꼼하고 친절한 설명 덕에 환자들이 터져나갔다. 그의 인터뷰 기사에는 지금도 ‘감사했다’는 제주 엄마들의 댓글이 달린다.

아이 셋 키우랴, 병원 운영하랴 바쁘게 살다 떠난 유럽 여행은 그의 마음을 홀렸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자유로움에 매료된 그는 가족과 유럽에서 살 궁리를 하게 됐다. 영국 의사 면허를 따는 등 유럽행을 준비하면서 영어도 공부할 겸 원서 한 권을 읽게 됐다. “당시 한미 에프티에이(FTA)가 추진되고 있었어요. 그 책을 보니까 에프티에이가 체결되면 다국적 제약기업이 우리를 집어삼키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들더라고요. 미국 출판사에 무작정 전화를 걸어서 제가 번역하고 싶다고 얘기했죠.” 강병철 번역가의 첫 역서 ‘제약회사는 어떻게 우리 주머니를 털었나’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유럽행 준비가 착착 진행되던 그때 갑자기 불운들이 덮쳤다. 그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후유증을 앓게 되고, 자녀에겐 정신질환이 찾아왔다. 잠시 한숨 돌리고자 병원을 닫고 2008년 가족 모두 캐나다로 건너갔다. 대자연의 위로 속에 안정을 찾은 가족은 캐나다에 눌러앉게 됐고, 그는 번역가로 제2의 삶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번역에 나서면서 그는 한국 출판계에는 턱없이 부족한 환자 지침서와 장애에 대한 책을 옮기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출판사들은 시장성 부족을 이유로 출간을 꺼렸다. 아내에게 “딱 1억을 까먹을 때까지만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2013년 직접 출판사를 차렸다. “서양에선 고혈압 같은 흔한 질환은 말할 것도 없고, 환자가 수백명에 불과한 희귀병들도 모두 환자 지침서가 출간되고 계속 개정판이 나옵니다. 저도 환자들에게 교과서가 되어 줄 책들을 출간하고 싶었어요.”

그가 세운 출판사 ‘꿈꿀자유’와 산하 브랜드 ‘서울의학서적’은 당뇨병부터 심장병, 뇌졸중까지 다양한 병과 감염, 장애 등을 다루는 40여권의 책을 펴냈지만 대부분 손해를 봤다. 아내와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2020년, 출판사 문을 닫으려 했을 때 갑자기 한 권의 책이 팔리기 시작했다.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가 코로나19 바람을 타고 대중의 주목을 받은 것이다.

이듬해에는 상복이 터졌다.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로 롯데출판문화대상(번역 부문)을,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로 한국출판문화상(번역 부문)을 받았다. “2018년에 자폐를 다룬 ‘뉴로트라이브’라는 책을 번역하고 대중강연을 10여차례 했어요. 그때 자폐아를 키우는 부모님들이 너무 많이 환영해줘서 감동을 받았어요. 그분들에게 어떻게 빚을 갚나 고민하다가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를 번역하게 됐는데, 책도 너무 두껍고 출판사도 어렵다보니 독자들의 펀딩을 받아서 출간하는 등 사연이 많았죠.”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 역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책이다. “제 아이가 안 좋았을 때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읽었는데, 널리 알려야겠다 싶어서 번역까지 했어요. 많이 팔리지 않아서 절판됐다가, 정신질환 자녀를 잃은 부모님께서 복간 비용을 전액 후원해주셔서 다시 빛을 보게 된 책입니다.”

번역상을 두 차례나 받은 배경엔 평생 시를 사랑한 남다른 언어 감각이 있었다. 정교하고 예민하게 선택한 단어들이 선명한 문장을 만들어내고, 선명한 문장들의 연결은 생기와 리듬을 뿜어낸다. 그의 탁월한 문장력은 자칫 딱딱하고 지루할 수 있는 분야의 책들에 ‘읽는 맛’을 불어넣었다. 그는 번역에 대해 “원작의 원형에서 벗어나면 안 되지만 그 원형에 묶여서도 안 된다”며 “저자가 한국인이었다면 이 부분을 어떻게 썼을까 고민하면, 그 자리에 있는 단어를 뺄 수 있는 용기도 생기고 그 자리에 없던 단어를 가져올 지혜도 생긴다”고 조언했다.

지금까지 의학 전문 번역가로 살아온 강병철 번역가는 앞으로는 문학 번역으로 지평을 넓혀가려고 한다. 사진 본인 제공

앞으로 걸어갈 길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다르지 않다. “과학의 편에 설 것, 역사가 흘러온 내력을 이야기로 들려줄 것, 목소리 작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될 것.” 여기에 더해 문학 번역으로도 지평을 넓혀가려고 한다. “번역가로 20년 정도 살아왔는데 더 늙기 전에 문학 번역을 안 하면 좀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선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로 시작해서 장기적으로는 헤밍웨이, 피츠제럴드를 번역하려고 합니다.” 문학소년은 그렇게 의사와 의학 전문 번역가를 거쳐 결국은 문학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최초의 자폐 진단부터 수용시설에 갇히고 차별과 학대를 받던 시절을 거쳐 ‘자폐 스펙트럼’으로 재정의되고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현재까지의 역사를 역동적으로 전한다. 강 번역가는 번역상 수상소감으로 “장애인이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넘어야 할 4가지 문턱인 수치심, 죄책감, 무지, 편견을 낮추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밝혔다.

존 돈반·캐런 주커 l 꿈꿀자유(2021)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

조현병 등 주요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과 가족을 위한 안내서로 환자의 자살, 폭력 등에 대처하는 법, 가족과 조화를 이루는 법, 치료기관과 협동 관계를 맺는 법, 주거, 직업, 돈을 관리하는 법 등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강 번역가는 “가족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만 올바로 알아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과 함께 작은 빛이 보일 것”이라고 추천했다.

리베카 울리스 l 서울의학서적(2020)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조류독감, 에이즈, 메르스, 코로나19의 공통점은? 동물의 병원체가 인간에게 건너와 생기는 인수공통감염병이라는 점이다. 강 번역가는 “우리가 어떻게 인수공통감염병을 불러들였는지, 왜 완전히 정복할 수 없는지, 이대로 가면 어떤 파국이 기다리고 있는지, 파국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말했다.

데이비드 콰먼 l 꿈꿀자유(2020)

재즈를 듣다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평론가가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재즈의 명곡 265곡을 소개한다. 원곡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부터 스탠더드 레퍼토리가 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사연을 들려준다. 피시통신에 재즈일기를 연재했을 정도로 재즈 마니아였던 강 번역가는 “오직 내가 좋아서 번역한 유일한 책”이라며 “사람들이 재즈를 듣는다면 세상이 더 살 만한 곳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테드 지오이아 l 꿈꿀자유(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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