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로막는 운명의 필연성은 없다 [책&생각]

고명섭 기자 2024. 6. 28.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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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철학자‧정치가 키케로 ‘운명론’
고대철학 전문가 이상인 교수 번역
스토아학파 ‘운명의 지배’ 거부하고
인간의 의지와 결단 옹호한 자유인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철학자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위키미디어 코먼스

운명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이상인 옮김 l 아카넷 l 1만 4000원

기원전 1세기의 로마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기원전 106~43)는 고대 그리스 철학 정신이 라틴어로 옮겨가는 데 통로 구실을 한 사람이다. 키케로가 말년에 쓴 ‘운명론’은 이 사상의 전도자가 그리스 철학을 어떻게 자기 것으로 소화해 새로운 언어로 표현했는지 생생히 알려주는 책이자, 신이 정해준 운명이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는 오래된 믿음을 반박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를 드높인 책이다. 그리스 철학 전문가 이상인 연세대 교수가 주석과 해제를 달아 우리말로 옮겼다.

키케로는 철학자이기 이전에, 로마 공화정 말기의 격변을 온몸으로 통과한 정치가였다. 기사 계급 출신이었던 키케로가 귀족계급 중심의 로마 정계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빼어난 연설 실력 덕분이었다. 연설의 힘으로 키케로는 43살 때 로마 최고 관직인 집정관(콘술)에 올랐고, ‘카틸리나 음모’를 적발해 분쇄함으로써 ‘국부’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곧이어 공화정의 토대를 흔드는 격랑이 밀려들었다. 군사지도자 카이사르-크라수스-폼페이우스가 로마 정치를 장악하고 제1차 삼두정치를 폈다. 키케로가 삼두정치에 반대하자 카이사르파는 키케로가 ‘카틸리나 음모’ 가담자들을 재판 없이 처형했다는 사실을 빌미로 삼아 정적을 공격했다. 키케로는 한동안 국외 망명을 떠났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당했다. 공화정을 재건할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와 손잡고 카이사르의 정치적 후계자 안토니우스의 탄핵을 주도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화해하고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펴자 키케로의 정치적 입지는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키케로는 안토니우스에게 죽임을 당했고 공화주의 꿈도 스러졌다.

키케로의 저술 작업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먼저는 국외 망명에서 돌아온 뒤 로마 정치 외곽에 머무르던 때인데, 이때 ‘국가론’ ‘법률론’ 같은 저작을 썼다. 두 번째는 카이사르 암살을 전후한 시기인데, 이 말년에 쓴 책 가운데 ‘신들의 본성에 관해’, ‘점술에 관해’, ‘운명에 관해’(운명론)는 ‘운명 삼부작’을 이룬다. 이중 ‘운명론’은 카이사르 암살 직후에 쓴 책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카이사르파 정치가인 아울루스 히르티우스가 책 속의 대화 상대자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당시 히르티우스는 차기 집정관으로 지명된 상태였는데, 키케로는 히르티우스를 끌어들여 안토니우스에게 맞서려고 했다. 히르티우스가 대화 상대자로 등장한 것은 이런 정치적 고려에 따른 것이었다.

키케로는 그리스 철학을 두루 공부했지만, 그중에서 특히 사유의 바탕으로 삼은 것이 신아카데미아학파의 철학이었다.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적통을 이어받은 신아카데미아학파는 모든 것을 의심의 눈으로 보며 끝없이 탐문하는 소크라테스적 태도를 철학 활동의 근간으로 삼았기에 회의주의 학파로 불린다. 그러나 이때의 회의주의(scepticism)는 진리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학설이든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철저히 따져 묻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탐구(skepsis)의 정신을 뜻한다. 키케로는 그런 정신으로 당대의 유력한 학파였던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학설을 해부해 그 내적 결함을 드러낸다.

이 책에서 키케로가 먼저 비판의 과녁으로 삼는 것이 ‘모든 일은 운명에 따라 일어난다’는 스토아철학의 운명론, 그중에서도 이 철학을 체계화한 크리시포스의 주장이다. 주목할 것은 키케로가 스토아철학의 운명론을 반박하는 데 에피쿠로스학파의 학설을 활용한다는 점이다.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이어받아 세상 만물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에피쿠로스 원자론의 독특함은 원자들 가운데 일부가 특별한 이유 없이 ‘경로 이탈 운동’을 한다는 주장에 있다. 원자의 그 경로 이탈에서부터 만물의 복잡한 운동이 일어난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이 원자론을 앞세워 스토아학파의 운명론을 거부한다. 원자의 이유 없는 이탈이 만물을 변화시키는 것이지, 세상의 변화를 지배하는 신적인 운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두 학설의 대립에서 키케로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손을 들어준다. “모든 일이 운명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에피쿠로스가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먹인 이 한 방을 받아들이겠다.”

그렇다고 해서 키케로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모두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원자의 ‘이유 없는 이탈’은 자유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따져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도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그런데 영혼의 원자가 이유 없이 이탈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보증하기는커녕 오히려 가로막는다. 원자가 아무 때나 멋대로 경로에서 이탈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의지를 발동해 행동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케로는 “허구적 이탈로 도피하는 에피쿠로스보다 더 정신의 자발적 운동을 부정한 사람은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원자 이탈이 아니라 자유의지라는 것이다.

키케로는 이렇게 에피쿠로스도 스토아철학도 모두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데 논의의 후반부에 가면, 크리시포스의 스토아철학이 운명론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크리시포스의 진정한 관심사는 운명론을 자유의지와 타협시키고, 더 나아가 자유의지의 우위를 입증하는 데 있다. 인간의 행위는 운명의 사슬을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성의 자유로운 본성을 따르며, 둘 가운데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자유의 본성이라는 얘기다.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데서 운명의 사슬은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이고 인간의 의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크리시포스의 결론이다. 그러나 크리시포스의 논변은 적잖은 혼란을 일으킨다. 키케로는 크리시포스가 한편으로는 운명론을 주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론을 주장함으로써 상호충돌의 진퇴양난에 빠진다고 비판한다.

키케로가 보기에 운명론을 강조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거나 제약하는 결과에 이른다. 키케로가 이야기하려는 것의 핵심은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와 결단을 봉쇄하는 운명의 필연성은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자유의 정신으로 키케로는 당대 로마 정치의 운명에 맞서 공화정 복원의 길을 찾으려고 분투했던 것이다. 키케로야말로 자유인이었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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