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가 만난 사람]“부와 명예 움켜쥐지 말아야”… 현충원 안장도 고사하고 떠난 ‘기부왕’
부친과 사업하며 고미술품 수집… 세한도와 1000억 원 땅 기부에도
얼굴 공개 꺼리고 명예박사도 마다… “폐 끼친다” 부고도 장지도 안 알려
국보 ‘세한도’의 기부자 손창근 씨(1929∼2024)는 고심 끝에 자식들에게 이런 결정을 알렸다. 그는 2012년 경기 용인의 산림 660만 ㎡(약 200만 평)을 국가에 기증해 그해 산림청으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아 현충원에 안장될 자격을 이미 마련한 상태였다. 평소 ‘얼굴 없는 기부왕’으로 본인을 드러내기를 단연코 거부한 그였지만 본인의 장지를 두고는 마지막까지 고심이 깊었단다.
“아버님이 현충원 안장 부분만큼은 몇 번이고 생각이 바뀌시는 것 같았어요. 결국 형님과 누님에게 ‘(대전)현충원에 직접 가보라’는 말씀까지 하셨지요.”》
발인이 열흘 정도 지난 25일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손 교수를 만났다. 자신이 공개되기를 꺼린 아버지처럼 아들도 무척 조심스러웠다. “이건 기사에는 쓰지 말아 달라”는 말도 종종 덧붙이며 감춰져 있던 아버지 얘기를 하나둘 풀기 시작했다. 그 일부를 전한다.
―현충원을 가지 않으셨는데 장지는 어디인가요?
“장지는 그냥 선산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친척 한 분도 장례에 참석 못 했다면서 장지를 가겠다며 물어오셨는데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며 장소를 안 알려드렸습니다.”
손창근 씨는 마지막 가는 길도 한결같았다. 본인이 사망하더라도 앞서 세한도 등을 기부한 국립중앙박물관, 임야를 기부한 산림청 등 주변에는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단다. “내가 뭐라고 바쁘신 분들 여기까지 오시게 하겠나. 주위에 폐 끼치지 말아라.”
고인의 빈소는 경기 용인세브란스병원이었다. 2009년부터 부인과 함께 머물던 실버타운과 가까운 곳이지만 서울 사는 사람들이 오가기에는 다소 먼 거리다. 그러니 ‘괜히 알려서 폐 끼치지 말라’는 마지막 당부였다.
손창근 씨는 앞서 통 큰 기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2012년 당시 1000억 원 상당의 임야를 기부할 때는 대리인을 보내 본인의 사진 한 장 나오지 않았다. 2017년 KAIST에 50억 원 상당의 건물과 1억 원을 쾌척했을 때도 설득 끝에 공개된 것은 뒷모습뿐이었다. 이후 KAIST가 명예박사 수여를 여러 번 제안했지만 그때마다 고사했다고 한다.
그는 2018년 구순을 맞아 ‘용비어천가’ 초간본(1447년)과 추사의 난초 걸작 ‘불이선란도’ 등 미술품 304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고, 박물관은 ‘손세기·손창근 기념실’을 마련했다. 개성 출신 실업가이자 고미술 수집가였던 손세기 씨(1903∼1983)와 그의 아들인 손창근 씨가 대를 이어 우리 고미술을 수집하고, 또 국가에 기증한 뜻을 기린 것. 한 번도 공개석상에서 기증의 소회를 밝힌 적이 없던 손창근 씨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한 점 한 점 정(情)도 있고, 애착이 가는 물건들입니다.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고 고민 고민 생각하다가 박물관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손 아무개 기증이라고 붙여 주세요.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손창근 씨의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택에는 고미술품들로 가득 채워진 방이 하나 있었다. 벽에 걸리거나 장 속에서 고미술품들 대부분은 간직돼 있었다. 하지만 금고에 들어가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국보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1844년)였다. 추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세한도의 서화 크기는 가로 70cm, 세로 33.5cm. 하지만 청나라와 조선 문사들이 쓴 감상평이 그림 옆에 줄줄이 덧붙어 현재는 총길이가 15m에 이른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농담으로 ‘이건(세한도는) 가치가 조 단위’라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무척 아끼셨다.”(손성규 교수)
그래서였을까. 세한도가 세상에 기증되기까지는 1년 2개월이 더 걸렸다. 앞서 임야를 기증할 때처럼 본인이 오랜 고민 끝에 결정을 먼저 하고, 가족들에게 결심을 알리는 수순이었다. 손 교수는 그런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평생 종교가 없었습니다. 신앙이 있다면 어떤 종교적 의미에 기대어 큰 기부 결정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기댈 곳이 없었어요. 오로지 오랜 시간 동안 홀로 외롭고, 고독한 가운데 어려운 의사 결정을 했죠. 사실 축의금마저도 10만 원 할까, 20만 원 할까 무척 고민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보다 훨씬 큰 결정을 그때그때 혼자 하시다 보니 너무 힘드셨겠다, 이제 와서 보니 자식으로서 안쓰러운 마음이 많이 듭니다.”
무엇보다 가족들은 손창근 씨의 기부에는 부친 손세기 씨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손세기 씨 또한 1973년 서강대에 보물 ‘양사언 초서’를 비롯해 정선, 심사정, 김홍도 등 고서화 200점을 기증했다. 당시 기증서 내용은 할아버지, 아버지가 몇 번이나 썼다 지웠다고 하면서 함께 작성한 것이라고 손 교수는 얘기했다. 손창근 씨가 기부를 이어간 이유도 이 글에서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께서 물려주신 유품들을 영구 보존하여 주시고 귀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 박물관을 통해 우리의 옛 문화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1973년 1월 30일 석포 손세기.”
손 교수가 어릴 적에는 종로구 가회동에서 조부모, 부모 등 3대, 9가족이 함께 살았다. 조부와 아버지는 틈이 나면 가까운 인사동을 돌며 고가의 고미술품을 사 모았다. 조부 손세기 씨는 간송미술관에 특별전이 열리면 거의 전시실에서 살다시피 할 정도로 고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 영향을 받아 손창근 씨도 고미술의 매력에 빠지며 부친과 함께 수집에 나선 것. 하지만 평소 생활은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면지를 모아 다시 썼고, 택시를 탈 때면 순방향에서만 탔지 반대 방향에서는 타지 않았어요. 한번은 부모님이 여행을 가셨는데, 어머니가 호텔방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냈더니 아버지가 외출복을 입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뭐 하러 비싼 콜라를 마시나, 내가 편의점 가서 사 오겠다.’” 손 교수는 또 “아버님이 어머님에게 항상 빠듯하게 생활비를 주신 게 기억이 납니다. 그런 절약 정신은 제 조부도 비슷해서 작은아버지 또한 ‘어릴 적에는 길바닥에 나앉을 정도로 집이 가난한 줄 알았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아끼고 아껴서 사 모은 미술품들은 이제 모두 기증된 상태다. 고인이 떠난 용인 거처에는 대신 세한도 기증으로 받은 문화훈장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 용인 임야 기증으로 받은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자리 잡고 있다.
국가에 기증된 세한도는 기증실이 개편된 이후 올 1월부터 지난달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됐다. 박물관 측에선 공개에 맞춰 손창근 씨의 방문을 부탁했지만 건강이 나빠져서 아들인 손 교수가 대신 다녀왔다고. 아끼던 세한도를 다시 보지 못하고 고인은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평소 이런 말을 했다고 손 교수는 전했다, 그 말에서 자식을 다 키워 세상으로 내보낸 뒤 애써 정을 줄이려는 부모의 마음이 느껴졌다.
“기부하면 다 그만인 것이다. 서약을 하고 나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얼굴 없는 기부왕’ 손창근 씨 |
1929년 개성 출생 1953년 서울대 섬유공학과 졸업 1960년대 스위스계 상사에서 일하다 부친과 함께 사업 2012년 임야 660만 ㎡기부,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2017년 KAIST에 50억 원 상당 건물과 1억 원 기부 2018년 추사의 ‘불이선란도’ 등 문화유산 304점 기부 2020년 추사의 ‘세한도’ 기부, 금관문화훈장 추서 2024년 향년 95세로 별세 |
황인찬 문화부장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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