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세상에서 가장 단출한 이삿짐

2024. 6. 27.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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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익숙한 곳과의 이별이자
낯설고 새로운 만남의 시작점
꽃이 피었다 지는 것 바라보니
단출하게 이삿짐 싼 씨앗 맺혀

곧 이사를 한다. 2년 만이다. 소설 쓰는 후배와 한 지붕 밑에 살고 싶어서 마당 있는 집으로 왔는데, 집을 빌려준 분의 사정으로 두 해 만에 이사하게 되었다. 정든 집에서의 이사는 아쉬움이 있기 마련이다. 봄이 시작될 때부터 늦가을까지 꽃이 번갈아 피던 마당은 내게 특별한 공간이었다. 어떤 꽃이 새로 피었을지 아침마다 설레었기에 이별의 감정은 더 절절해진다.

이 마당의 포도는 2년 연이어 몇 송이밖에 열리지 않았다. 엉성한 포도 서너 송이가 단내를 풍길 때면, 새들이 날아와 알맹이를 까먹고는 껍질만 소복이 남겨놓고 사라졌다. 그런데 올해에는 포도가 참 많이 열렸다. 떠나는 사람에게 베푸는 선심 같기도 하지만 아쉽게도 초록 알맹이가 까맣게 익기 전에 갈 날이 잡혔다. 내가 이 집을 비우고 떠나가도 까만 포도알들은 더 많은 새를 불러들이리라.
천수호 시인
이사는 내게 이렇듯 꽃과 열매가 가득한 정원과의 이별이며, 자주 내려다보던 빽빽한 주택들과의 이별이며, 눈이 오면 슬슬 기어 내려가야 하는 비탈진 골목과의 이별이다. 그러나 이사가 이별의 슬픔만 느끼게 하는 건 또 아니다. 묵은 먼지를 털어낼 기회며, 껴안고 살던 가재도구들을 과감하게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2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도 정리해야 하고 책도 상당 부분 처리해야 한다. 책을 정리하다가 오래전에 떠난 친구의 편지를 발견하기도 하고 새롭게 자극을 주는 자료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 살다 보면 쌓이게 되는 것들을 처음처럼 비우려 하지만 버릴 것과 버릴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일은 늘 더디고 고되다.

그런데 떠나는 집에 늘 낡은 것만 남는 것도 아니다. “이사를 가려고 아버지가/벽에 걸린 액자를 떼어냈다/바로 그 자리에/빛이 바래지 않은 벽지가/새 것 그대로/남아 있다/이 집에 이사 와서/벽지를 처음 바를 때/그 마음/그 첫 마음”(안도현 시인의 ‘처음처럼’ 중에서) 이렇게 처음 이사 올 때의 그 마음을 그대로 기억하게 하는 장면들과도 맞닥뜨리게 된다. 타월 한 장만큼만 남아 있는 새것, 그 새것은 늘 처음에 있었다는 것!

내가 어렸을 적에도 이사와 관련한 강렬한 기억이 있는데, 기차를 타고 이사한 기억은 내 삶에서 몇 안 되는 큰 장면이다. 대구에서 부산으로의 이주였는데, 아주 멀고 낯선 세계로 달려가는 열차의 두근거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멀리 가는 나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하나씩 내놓던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가장 애틋했다.

그렇지만 어린 나에게는 또, 이별 끝에 새로운 만남이 딸려 오는 것이 이사의 매력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어리숙하고 틈이 많던 예전의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꽤 긴장했다. 새 친구들에게 당차고 똘똘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비장하게 각오한 것은, 이사가 지금까지 스스로에게 불만스러웠던 부분들을 갱신하는 ‘처음’의 시간임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결혼 후에도 열 번이 넘는 이사를 했다. 그중 인생에서 가장 장거리 운전을 하게 된 것이 약 스무 해 전에 대구에서 일산으로 이사 올 때였다. 아직 어린 맏딸을 조수석에 태우고 이정표를 더듬던 그 첫길의 두려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서울 근교에서 일산으로 진입하는 길을 놓치고 인천으로 들어섰을 때의 낭패감은 낯선 삶의 시작에서 오는 초조함을 미리 당겨 맛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패가 많았던 그동안의 관계를 비우고, 삶의 방식들을 바꾸는 방법에는 이사만큼 확실한 게 없었다.

곧 떠날 마당에는 지금, 접시꽃이 매일 두 송이씩 꽃잎을 벌리고 있다. 저음에서 고음으로 연주하는 금관악기처럼 아래에서부터 위로 하나씩 나팔관 같은 꽃을 피운다. 보라색 리아트리스는 접시꽃과는 반대로 위에서 아래로 꽃이 피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꽃이 제 방식대로 새로 피었다 지는 것도, 사실 다 비워내고 새로운 곳에 이주하려는 꽃의 슬기로운 이사 준비가 아니던가. 그래서 꽃이 진 자리에, 꼭 필요한 이삿짐만 단출하게 싼 씨앗이 맺히지 않던가.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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