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세상에서 가장 단출한 이삿짐
낯설고 새로운 만남의 시작점
꽃이 피었다 지는 것 바라보니
단출하게 이삿짐 싼 씨앗 맺혀
곧 이사를 한다. 2년 만이다. 소설 쓰는 후배와 한 지붕 밑에 살고 싶어서 마당 있는 집으로 왔는데, 집을 빌려준 분의 사정으로 두 해 만에 이사하게 되었다. 정든 집에서의 이사는 아쉬움이 있기 마련이다. 봄이 시작될 때부터 늦가을까지 꽃이 번갈아 피던 마당은 내게 특별한 공간이었다. 어떤 꽃이 새로 피었을지 아침마다 설레었기에 이별의 감정은 더 절절해진다.
그런데 떠나는 집에 늘 낡은 것만 남는 것도 아니다. “이사를 가려고 아버지가/벽에 걸린 액자를 떼어냈다/바로 그 자리에/빛이 바래지 않은 벽지가/새 것 그대로/남아 있다/이 집에 이사 와서/벽지를 처음 바를 때/그 마음/그 첫 마음”(안도현 시인의 ‘처음처럼’ 중에서) 이렇게 처음 이사 올 때의 그 마음을 그대로 기억하게 하는 장면들과도 맞닥뜨리게 된다. 타월 한 장만큼만 남아 있는 새것, 그 새것은 늘 처음에 있었다는 것!
내가 어렸을 적에도 이사와 관련한 강렬한 기억이 있는데, 기차를 타고 이사한 기억은 내 삶에서 몇 안 되는 큰 장면이다. 대구에서 부산으로의 이주였는데, 아주 멀고 낯선 세계로 달려가는 열차의 두근거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멀리 가는 나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하나씩 내놓던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가장 애틋했다.
그렇지만 어린 나에게는 또, 이별 끝에 새로운 만남이 딸려 오는 것이 이사의 매력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어리숙하고 틈이 많던 예전의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꽤 긴장했다. 새 친구들에게 당차고 똘똘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비장하게 각오한 것은, 이사가 지금까지 스스로에게 불만스러웠던 부분들을 갱신하는 ‘처음’의 시간임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결혼 후에도 열 번이 넘는 이사를 했다. 그중 인생에서 가장 장거리 운전을 하게 된 것이 약 스무 해 전에 대구에서 일산으로 이사 올 때였다. 아직 어린 맏딸을 조수석에 태우고 이정표를 더듬던 그 첫길의 두려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서울 근교에서 일산으로 진입하는 길을 놓치고 인천으로 들어섰을 때의 낭패감은 낯선 삶의 시작에서 오는 초조함을 미리 당겨 맛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패가 많았던 그동안의 관계를 비우고, 삶의 방식들을 바꾸는 방법에는 이사만큼 확실한 게 없었다.
곧 떠날 마당에는 지금, 접시꽃이 매일 두 송이씩 꽃잎을 벌리고 있다. 저음에서 고음으로 연주하는 금관악기처럼 아래에서부터 위로 하나씩 나팔관 같은 꽃을 피운다. 보라색 리아트리스는 접시꽃과는 반대로 위에서 아래로 꽃이 피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꽃이 제 방식대로 새로 피었다 지는 것도, 사실 다 비워내고 새로운 곳에 이주하려는 꽃의 슬기로운 이사 준비가 아니던가. 그래서 꽃이 진 자리에, 꼭 필요한 이삿짐만 단출하게 싼 씨앗이 맺히지 않던가.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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