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의 묵묵]사람의 우물
물건 만드는 일에 혁명 자주 일어나
정작 생명 돌보는 일에는 안 나타나
여성들 노동에 대한 처우가 그렇다
영화 ‘열 개의 우물’ 엄마들 이야기
이 우물 덕분에 혁명은 죽지 않았다
어떤 사회형태도 사람과 물자의 재생산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인간 활동을 ‘물자를 생산하는 일’과 ‘사람을 돌보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일’로 나누어 볼 때, 자본주의에서는 둘의 관계가 다른 사회형태들과 확연히 다르다고 했다. 사람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대상은 아무래도 사람이다. 그래서 대부분 사회형태에서는 사람의 일을 물건의 일보다 우선시한다. 사람을 향한 노동을 물자를 생산하는 노동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반대다. 그레이버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마치 “물자 생산을 늘리는 것이 사회의 일차적 존재 이유인 것처럼 행세”한다(<역순의 혁명>).
그래서인가. 물건 만드는 일에서는 혁명도 자주 일어나고 새로운 미래가 닥칠 것처럼 야단인데, 정작 혁명이 일어나야 할 것 같은 사람을 돌보는 일, 생명을 돌보는 일에서는 좀처럼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존중받지 못했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이 사회가 그렇게 ‘행세’하는 것뿐이다. 사실 중요한 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건 무언가를 값싸게 얻고 싶을 때 흔히 쓰는 술책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사람 돌봄을 수행해온 여성들의 노동이 그런 처우를 받아왔다.
최근 김미례 감독의 <열 개의 우물>을 보고 이 문제를 다시 떠올렸다. 내 생각에 이 영화는 지난 시절 한국 사회의 성격과 사회운동에 관한 매우 중요한 해석이다. 이 영화는 1970~1990년대 일군의 여성들이 싸웠던 두 개의 전선을 다루고 있다(감독은 화면 분할과 교차 편집 방식으로 이 전선들을 선명하게 부각한다). 하나는 나라의 가부장 행세를 하는 유신정권에 맞섰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인구 전체를 산업 생산에 동원하는 체제에 맞서 사람에 대한 사회적 돌봄, 특히 아이들을 지켜내고자 했던 가난한 엄마들과 여성운동가들의 투쟁이다. 인천 만석동에서 어린 나이에 동일방직에 취업했던 안순애의 이야기가 절반이고, 만석동과 십정동에서 가난한 아이들의 돌봄을 떠맡았던 홍미영, 유효순, 김현숙 등의 이야기가 나머지 절반이다(영화 제목은 ‘십정동’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두 개의 전선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한동네의 이야기다. 한국전쟁 때 내려온 피란민들, 농촌을 떠나온 이농민들, 도시 개발로 쫓겨난 철거민들이 움막집과 판잣집을 짓고 살았던 빈민촌. 가난한 엄마들은 한 푼이라도 벌어야 했기에 공장이나 부두, 갯벌로 일을 나갔고, 아이들도 조금만 자라면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찾았다. 공장에서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어용노조에 맞서야 했고, 동네에서는 차가운 골방에 방치된 아이들을 어떻게든 돌보아야 했다. 영화는 여기가 정말로 중요한 전선이었다는 것, 민주노조를 건설하는 것만큼이나 탁아소와 놀이방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변혁운동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개발독재 시기 우리가 약탈당한 것이 무엇인지, 이 여성들이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이거 인터뷰하면서 알았는데, 내가 무슨 대단한 철학을 가지고 투사로 싸운 게 아니야.”(안순애) 이들의 투쟁에서는 민주주의의 고상한 이념도, 사회변혁의 철학도 내걸리지 않았다. 그런 이념이나 철학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가 출발점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당장의 필요, 즉 내일 먹을 밥을 벌어야 하고 오늘 아이 맡길 곳을 찾아야 했던 그 필요 때문에, 이들은 투쟁했고 일상을 발명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는 지난 시절 민주화운동의 대단한 성취라고 말했던,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된, 대통령 직선제 쟁취나 대기업 민주노조 건설 등과는 결이 다르다. 사회가 전체적으로 크게 바뀌었으면 하는 소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이들이 붙든 것은 일상의 대안을 만드는 “매우 느리고 고통스러운” 투쟁이었다.
그레이버는 앞의 글에서 “내 생각에 페미니즘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모든 사람에게 ‘상황’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을 계속 주지시킨 것”이라고 썼다. 내가 영화 속 여성들에게 느낀 것도 그것이다. 십정동의 한 초등학생 아이가 새벽에 일 나가는 어머니를 보며 쓴 “우리 어머니는 쇳덩어리입니다”라는 시구도 그것이다. 물론 이 여성들이 만들어낸 우물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우물 덕분에 사람들이 살았고, 아이들이 웃었고, 혁명이 죽지 않았다. 상영관 찾기가 어렵지만 가급적 많은 사람이 보았으면 좋겠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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