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 (129) 경복궁 경회루
두 사진은 1971년과 2023년의 경복궁 경회루(慶會樓)를 담고 있다. 경회루의 외관은 50여년의 세월 동안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다만 1971년에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1층의 돌기둥에 청색과 황색 천을 씌어 놓았다. 경복궁 근정전의 서북쪽 연못 안에 있는 경회루는 조선시대 때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외국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누각이다.
처음 경복궁을 지을 때 작은 누각이 있었으나, 조선 태종 때인 1412년 연못을 확장하면서 누각을 다시 크게 지어 경회루라는 이름을 붙였다. 경회루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돌기둥만 남았다가, 270여년이 지난 고종 때인 1867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사각형의 섬을 만들어 그 위에 누각을 세웠고, 돌다리 3개를 놓아 육지와 연결하였다. 돌다리 가운데 사진에 보이는 가장 남쪽의 다리가 폭이 가장 넓어 임금이 이용하였다. 정면 너비가 34.4m, 측면 너비가 28.5m의 경회루는 한국에서 가장 큰 누각이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으며, 누각을 떠받치기 위해 세운 48개의 돌기둥은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따라 바깥 돌기둥 24개는 네모나게, 안쪽 돌기둥 24개는 둥글게 만들었다. 바깥쪽의 24개 기둥은 24절기, 그리고 24방(方)을 상징한단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연못 위에 아름답게 서 있는 경회루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건축물로, 한국을 소개하는 책자에 빠짐없이 등장하며, 경복궁 내에서 국내외 관람객에게 가장 인기 있는 명소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인 관광객들은 서울 최고의 볼거리로 경회루와 창덕궁 비원을 꼽았다. 경회루는 여러 역사적 사연을 담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1455년 단종이 삼촌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겨준 현장이며,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연산군이 향락을 좇은 장소이기도 했다. 나라를 뺏긴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총독의 단골 연회장으로 쓰였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미국의 한 신문이 한국의 경제 위기를 경회루가 기울어져 연못에 침몰하는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만원권 구권 지폐의 뒷면에 경회루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 이 칼럼에 게재된 사진은 셀수스 협동조합 사이트(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정치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지리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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