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환의 이미 도착한 미래] ‘위선’ 일망정 ‘공감’과 ‘배려’를 보고 싶다

부산대 석좌교수·전 한국인터넷진흥원장 2024. 6. 27.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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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석좌교수·전 한국인터넷진흥원장

덕수궁 후원에 가면 궁궐 내에서 유일하게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청의정’이라는 이름의 작은 정자가 있다. 그 옆에는 한 마지기 넓이 정도의 논이 있다. 모내기 철이 되면 임금은 이곳에서 직접 모를 심고 청의정에서 풍년을 기원하며 신하들과 새참을 먹었다. 궁궐 내의 농경지는 중국과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도 유례가 없다. 농업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던 시절의 ‘보여주기식 쇼’였다. 하지만 이를 통해 조선의 임금들은 한해 농사의 풍흉을 읽었고, 가뭄이나 흉년이 들면 음식의 양이나 반찬 가짓수를 줄였다. 더 나아가서는 술도 끊었다.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식량을 하늘로(사마천의 사기) 삼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경제와 민심이 중요하고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비록 쇼일지라도 세상일을 먼저 근심하고 사적인 즐거움을 뒤로 돌렸다. 그것이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선우후락(先憂後樂)’의 마음가짐이었다. ‘선우후락’은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어려운 이들에 대한 공감과 배려이다.

영화 ‘그녀(her)’에서 인공지능 사만다는 8316명의 인간과 동시에 대화를 나누고 그 중 641명과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지난 5월 중순 오픈 AI는 사람처럼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 GPT-4o를 공개했다. 휴대폰 카메라에 내 얼굴을 비추고 대화를 하면, 내 표정을 살피고 감정을 읽어가면서 답변한다. 영화 ‘그녀’의 장면이 현실에서 실현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인공지능은 감정이 없고 다만 그럴듯하게 대답할 뿐이라는 것을.

인공지능이 결코 인간을 능가할 수 없는 부분은 공감 능력이다. 공감할 수 있어야 고객이나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나 불편한 점(pain point)을 발견할 수 있다. 대통령이나 정부의 존재 이유는 군림하거나 통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정당의 정책도 그렇고 기업의 제품도 공감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발견할 수 있고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지도층들은 공감 능력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은 지난 4월에는 마트에서 “대파 한 단에 875원이면 합리적인 가격 같다”고 말하는가 하면 5월에는 재래시장에서 멍게를 보고 “소주만 있으면 딱”이라고 한다.

서민은 연일 치솟는 장바구니 물가에 시달리고 상인은 극도의 경기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도 그랬다. 1년 사이에 내수경기의 지표인 ‘1인 자영업자’ 11만 명이 폐업하고, 자영업자들의 은행 대출 연체율은 2022년 0.17%에서 2024년에는 0.54%로 치솟았다. 2015년 이후 최고이다. 60대 이상 자영업자의 비중도 2000년 17.6%에서 2023년에는 36.5%로 뛰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가계 실질소득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1.2% 줄었다. 그래도 기재부는 6월 진단에서 “제조업과 수출 호조세에 내수회복 조짐”이라고 말한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지역교부금은 줄이면서 부자들을 위한 종부세와 상속세는 깎아주자고 말한다. 지난해 500억 원 이상 상속자는 겨우 26명이었다.

2017년 국민권익위원회는 스승의 날에 ‘제자가 주는 카네이션도 받으면 안 된다’고 유권해석했지만, 2024년 권익위는 대통령 부인이 받은 ‘명품백’은 법적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지난해 이후 8명의 청년이 전세 사기 피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실 PF대출에는 35조 원이 넘는 재정지원을 하지만 전세 사기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에는 거부권이 칼같이 발동된다. 주무부서인 국토교통부 장관은 “젊은 분들이 경험이 없다 보니 덜렁덜렁(전세) 계약했던 부분이 있다” “15평 집에 전세를 얻어야 할 것을 20평 집에 사는 과소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 섞인 시각으로 시장 관찰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제도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다이어트 하는 사람이 끼니 걱정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듯이 종부세가 걱정인 계층이 전세 제도의 문제점을 공감하기는 어렵다. 4월 28일 서울에서 발행되는 한 경제지의 제목은 이랬다. ‘부모님 주신 용돈 모아 집 사야지, 자칫하면 증여세 내요’.

급류에 안전장비 없이 수중 수색을 지시해, 채 상병 순직 사건의 피의자인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은 “군인은 국가가 필요할 때 군말 없이 죽어주도록 훈련되는 존재”라며 “자신은 지시한 것이 아니라, 지도만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밥 먹었냐”는 질문은 식사했느냐는 뜻이다. “안 먹었다”고 한 거짓말이 들키자 ‘밥’이 아닌 ‘짜장면‘을 먹었다고 둘러대는 식이다. 한국사회의 시스템이 무너지고 모두가 부끄러움을 잊은 것 같다.


주변의 어려움에 공감하기보다는 나 살기에만 급급하다. 알아서 스스로 살길 찾으라는 의미의 ‘각자도생(各自圖生)’은 중국에서 기원한 대부분의 사자성어와는 달리 ‘메이드 인 조선’이다. 임진왜란 때 의주에 달아나 있던 선조가 백성들에게 한 말이다. 차라리 선조가 정직했던 것일까? ‘위선’일망정 지도층의 공감과 배려를 보고 싶다. ‘공감’이 없으면 ‘공동체의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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