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휘의 시네필] 음식·로맨스 뒤에 감춰뒀네, 가부장제를 겨눈 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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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란 안 홍은 과작의 작가이다.
외제니 사후 자기 아이디어를 뒷받침해 줄 손발을 잃고 폐인이 된 도댕처럼, 겉으로 중년 로맨스와 음식 영화를 가장하지만 트란 안 홍은 그 안에 가부장제의 맹점을 겨냥한 자신만의 비수를 감춰두는 걸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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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란 안 홍은 과작의 작가이다. ‘그린 파파야 향기’(1993)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다음 작품인 ‘씨클로’(1995)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거머쥐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여름의 수직선에서’(2000)를 기점으로 영화적 공간으로서 베트남을 떠난 뒤 그의 경력은 긴 공백과 부침을 겪으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2009)는 누아르 장르의 플롯에 감각적 비주얼과 과잉된 폭력, 상징적 도상을 얹은 극단화한 시도로 혹평 세례를 받았고, 동명 소설 원작을 각색한 ‘노르웨이의 숲’(2010)과 ‘이터니티’(2016) 또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프렌치 수프’(2023)에서 감독은 ‘이터니티’에 이어 다시 한번 벨 에포크로 돌아온다. 칸영화제 감독상으로 오랜 부진을 씻어낸 이 영화의 영문 제목 ‘The Taste of Things‘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물의 정취’ 정도로 옮기는 편이 적절할 이 중의적 제목이야말로 프랑스어 원제 ’도댕 부팡의 열정‘(La Passion De Dodin Bouffant)보다 영화 성격을 잘 함축하는 표현일 것이다.
영화는 요리를 준비하는 과정을 집요한 탐정의 수사처럼 따라간다. 밭에서 막 캐낸 흙 묻은 채소 이미지로 시작해 다양한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하는 일련의 지난한 노동의 시간. 자연광 촬영을 고집하는 트란 안 홍의 회화적 연출은 푸른색을 머금은 동틀 녘 어둠에서 황금빛 햇살이 쏟아지는 아침의 밝음으로 넘어가는, 시간의 진행에 따른 조명 변화를 날 것의 재료에서 공예품을 방불케 하는 음식으로의 이행 과정에 포갠다. 여기서 요리는 거칠고 죽어있는 것(재료)을 부드럽고 생명을 머금은 무언가(음식)로 재탄생시키는 창조적 행위가 된다.
베트남에서 프랑스로 무대를 옮겼지만, 트란 안 홍의 구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 이면에는 고색창연한 성차와 공간의 이분법적 대비가 깔려있다. 외제니(줄리엣 비노쉬)의 공간인 아래층 부엌은 찬란한 창조의 산실이자 상징적 자궁이지만, 영화는 클로즈업으로 감미로운 음식의 차짐뿐 아니라 때때로 고단한 노동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외제니의 표정을 담는 걸 잊지 않는다.
반면 윗층 거실에는 멋진 식사를 마련해 준 데 대한 감사를 표시하긴 하지만 그 작업의 피로와 괴로움은 외면하고 속 편하게 미식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도댕(브누와 마지멜)과 부르주아 친구들이 자리한다. ‘안사람’으로서 여성의 동선은 부엌을 중심으로 한 집안과 주변 텃밭에 국한되지만, ‘바깥사람’인 남성은 여가 삼아 곳곳을 자유로이 쏘다닌다.
‘그린 파파야 향기’ ‘여름의 수직선에서’에서 일상을 유지하는 일은 여성 몫인 반면 남성은 애써 가꾼 결실을 ‘먹어 치우는’ 존재였고, ‘씨클로’에는 계급성에 따른 공간 구분이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결혼으로 완성을 꾀하는 가부장제에서 남성은 자기 삶의 많은 부분을 여성에게 내맡기지만, 때문에 의지할 여성의 존재 없이 살 수 없다는 역설적 종속 상태에 처한다. 외제니 사후 자기 아이디어를 뒷받침해 줄 손발을 잃고 폐인이 된 도댕처럼, 겉으로 중년 로맨스와 음식 영화를 가장하지만 트란 안 홍은 그 안에 가부장제의 맹점을 겨냥한 자신만의 비수를 감춰두는 걸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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