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공생의 역사 [노정혜 칼럼]
노정혜 |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손바닥을 펴서 고형의 미생물 배지 위에 올려놓고 손도장을 찍으면, 하루 지나서 손자국 모양대로 온갖 세균과 곰팡이 군락들이 자라나는 것을 볼 수 있다. 30년 전에는 이 결과를 우리의 손이 얼마나 많은 미생물로 오염되어 더러운지 보여주는 실례라고 해석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해석이 바뀌었다. 손을 비누로 씻더라도 여전히 남아 있는 미생물들이 실제로는 우리의 피부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등공신이라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는 피부뿐 아니라 호흡과 소화, 생식을 담당하는 모든 장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이 함께 살고 있고, 우리의 건강도 이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발견들이 지난 10여년간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게놈(지놈·genome)이라 불리는 유전체와 운을 맞추어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이라 불리는 미생물균총은 모든 종류의 동식물 개체들과 공생하고 있다. 사람과 함께 사는 마이크로바이옴은 세균과 고균, 진균을 포함하여 그 종류가 일천 종을 넘고, 그들이 가진 유전자의 총수는 사람의 유전자 2만3천개보다 약 100배 정도 많다. 유전자가 많은 만큼 수행할 수 있는 대사능력도 다양하다. 상당수의 미생물이 주로 대장에 서식하는데, 그들 덕분에 탄수화물의 분해와 담즙 대사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대사물질로 인해 우리 몸의 생리적 기능이 원활하게 돌아간다. 장내 미생물은 사람마다 독특한 유형의 균형적 분포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 다양성의 균형이 깨지면 비만이나 암, 면역력 저하, 신경 질환과 노화가 촉진된다. 미생물균총이 인체의 정상적 발달과 생리적 기능에 필수적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인간은 더 이상 호모사피엔스라는 단일종이 아니라 여러 미생물들과 연합된 복합생물종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그리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피부와 인체의 각종 장기에 포진되어 사는 미생물들 외에도, 우리 몸은 약 20억년 전부터 시작된 공생의 결과로 세균을 세포 안에 품고 있다. 공기를 호흡하고 살아가는 모든 생물체는 미토콘드리아라는 세포 내 소기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알파프로테오박테리아란 호기성 세균이 고균(古菌)세포 안으로 들어와 내부공생을 시작하면서 생겨났다는 것이 최근의 정설이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핵과는 별도로 자신만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는데, 이 염색체의 유전정보가 알파프로테오박테리아의 정보와 거의 같다. 우리의 호흡은 공기 중의 산소를 들이마셔 인체의 모든 세포로 산소가 전달되도록 함으로써 그 일차적인 임무가 달성된다. 세포들로 전달된 산소는 세포 안 미토콘드리아에서 영양분을 산화시켜 에이티피(ATP·아데노신삼인산)라는 에너지 분자를 만들게 됨으로써 최종 임무를 달성한다. 이렇듯, 산소를 호흡하고 살아가는 모든 생물체가 필요한 에너지를 왕성히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것은 20억년 전 고균 속으로 들어가 공생을 시작한 미토콘드리아의 선조 박테리아 덕분이다.
그뿐인가. 미토콘드리아를 갖게 된 진핵세포들은 또 다른 세균과 공생하면서 식물이 탄생하는 길을 열었다. 식물은 태양의 빛에너지를 받아 이산화탄소로부터 탄수화물이란 유기물을 만들어 내고 산소를 배출한다. 광합성이라 알려진 이 과정은 식물의 세포 안에 있는 엽록체란 소기관에서 일어난다. 봄부터 여름까지 몇달이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연둣빛 잎사귀들이 순식간에 무성한 초록으로 변하고 열매를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광합성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절감하게 된다. 이 덕분에 지구상의 생물들이 먹고 사는 음식물의 기반, 먹이사슬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식물의 엽록체는 태양광을 흡수하는 파란 색소 때문에 남세균이라 불리는 박테리아에서 유래했다. 엽록체도 미토콘드리아처럼 자신만의 염색체를 갖고 있는데, 엽록체가 가진 유전정보는 남세균의 유전정보와 매우 가깝게 일치한다.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남세균들은 식물과 같은 방식의 광합성을 수행하는데, 약 25억년 전 남세균의 활동 덕분에 지구 대기에 산소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 뒤 산소를 호흡하며 에너지를 얻던 진핵세포에 남세균이 들어가 내부공생을 하면서 엽록체가 되었고, 식물이 생겨났다. 엽록체가 수행하는 광합성 덕분에 지구상에 산소는 더 많아지고, 먹거리의 기본인 유기물들도 더 풍성해졌다.
우리 주변에서는 곤충을 비롯한 동물들이 공생을 통해 식물의 수정과 열매 확산을 도와주는 현상을 많이 볼 수 있다. 자연계는 여러 종의 생물체들이 함께 살면서 만들어 내는 창발적 현상들로 가득 차 있다. 맨눈으로 보기 힘들지만, 공기 중의 질소를 붙들어서 아미노산의 원료를 만들어 내고, 이를 통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것은 콩과식물의 뿌리와 공생하는 뿌리혹박테리아의 활동이다. 동물들이 소화시키지 못하는 셀룰로스를 분해하여 영양분으로 만드는 것은 초식동물의 위 속에 함께 사는 박테리아들의 활동이다. 풀을 고기로 바꿀 수 있는 이들 덕분에 우리의 식탁도 자연계의 다양성도 한층 더 풍성해진다.
이처럼 우리의 몸과 자연계에는 세포 안에서, 또는 개체들 사이에서 서로 주고받으며 서로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다양한 공생관계가 오랜 기간에 걸쳐 자리를 잡아 왔다. 제한된 자원을 두고 다투어야 하는 경쟁관계가 진화를 일으키는 압력으로 작용한다면, 그에 대응하여 살아남는 (그래서 자손을 많이 남길 수 있는) 여러 방식 중에 공생은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다. 오늘날 현존하는 생물들은 공생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성공적인 생존자들이다.
우리의 유전자와 자연계는 공생의 유리함 덕분에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이야기를 끝없이 들려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사회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자연의 이치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점점 심해지는 개인주의는 벌떼처럼 모였다 흩어지는 팬덤과 맞물려 자신의 선호에 맞는 집단 외에는 소통을 거부하며 극심한 파편화를 초래하고 있다. 공동체의 범위는 축소하고, 생각이 다른 구성원은 분리해 낸다. 이는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된 함께 살기의 방식을 퇴화시키며, 결과적으로 자신이 속한 커다란 공동체를 파괴한다. 정치권의 여야 간 단절을 보면서 경쟁자와도 연합하고 공생하며 국민의 눈치를 살폈던 예전의 정치인들이 그리워진다. 의-정 간, 세대 간 불통으로 꽉 막힌 의료사태를 풀려면 우리의 본성에 부합하는 공생의 정신이 깨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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