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흘린 말 ‘받아 치는’ 능력, 더는 필요치 않아 [슬기로운 기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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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부 소속으로 국회에서 일하는 기자 중 막내를 '말진'이라고 한다.
당시 말진 기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타자를 빠르게 치는 것이었다.
당연히 손가락이 빠른 막내 기자는 '엘리트 말진'으로 추앙받았다.
최근 말진 생활을 함께했던 타사 기자를 만났는데 그도 내가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허탈감을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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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 통일외교팀 기자
정치부 소속으로 국회에서 일하는 기자 중 막내를 ‘말진’이라고 한다. 내가 말진으로 국회에 있던 때는 2019년. 당시 말진 기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타자를 빠르게 치는 것이었다. 정치인들의 말, 즉 ‘워딩’을 실시간으로 노트북에 옮겨 담으려면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입을 쳐다보며 손가락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놀려야 했다. 그러다 순간 눈앞 정치인의 ‘워딩’을 제대로 받아 적지 못해 보고가 늦어지면 선배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그러다 보니 말을 빠르게 하기로 유명한 정치인이 발언을 시작하면 말진들 사이에서는 한숨이 터져 나오고, 옆 사람에게 “방금 뭐라고 했어?”라고 묻고 ‘워딩’을 교차 확인하느라 바빠진다.
취재원과 전화 통화를 할 때도 다르지 않다. 당연히 손가락이 빠른 막내 기자는 ‘엘리트 말진’으로 추앙받았다. “야, 너 오늘 ‘워딩’ 컨디션 좋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들으면 엘리트가 된 양 우쭐해졌다. 말진들의 타자 속도는 업무 효율성을 좌우했다. 제때 발언을 받아 치지 못하면, 녹음을 듣고 다시 치느라 일감이 두배로 늘기 때문이다. 말진들 사이에서 서로 ‘워딩’들을 공유하다가 다른 이가 빠짐없이 빼곡하게 적어 놓은 작품(?)을 보면 쓸데없이 위축되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나 역시 그렇게 3년 동안 말진을 하며 자연스레 타자 속도는 빨라졌고 이제 남에게 뒤지지 않는 장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나의 뿌듯함은 점차 씁쓸함으로 변해갔다. 녹음을 실시간 문장으로 풀어내 주는 인공지능(AI) 애플리케이션이 등장한 것이다. 처음에야 인공지능의 ‘음성-텍스트 변환’ 기능이 워낙 엉망이라 참고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이제는 속도에 정확도까지 겸비한 완전체로 성장했다. 현장 말진들은 어쩔 수 없이 인공지능에 자리를 내줘야 하는 처지가 됐다. 특별한 경우를 빼면, 취재원의 말을 받아 치는 수고로움은 인간 기자의 손을 떠나게 된 것이다. 최근 말진 생활을 함께했던 타사 기자를 만났는데 그도 내가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허탈감을 털어놨다. “타자가 최대 강점이었는데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졌네. 이런….”
인공지능에 업무를 빼앗기는 것은 비단 기자들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대한변호사협회(변협)도 인공지능을 무분별하게 활용할 경우 발생할 부작용을 경계하고 나섰다. 변협은 ‘법무법인 대륙아주’가 지난 3월 선보인 인공지능 챗봇 서비스가 변호사법을 어겼다며 징계 절차에 들어갔다. 이 서비스는 누구든 누리집에 질문을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관련 법률 검토 등을 해서 답변을 내놓는데, 변협은 이를 변호사가 아닌 인공지능이 영리 목적으로 변호사 업무를 하는 것으로 봤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막아낸다고 해서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수 있는 걸까. 오히려 한편에선 인공지능이 단순 반복 업무를 대신해 줌으로써 인간이 전문적이고 창의적인 영역에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이란 기대감도 적지 않다. 실제 기자들도 타이핑 대신 취재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됐다. 인공지능을 ‘협업’이라는 관점에서 활용해 업무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면 인간은 인공지능과의 경쟁에서 뒤져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진 존재가 아니라 다른 쓸모를 찾을 새로운 기회를 맞이한 셈이 아닐까.
newir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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