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우정’ 처용의 묻지마 출연료 [진옥섭 풍류로드]

한겨레 2024. 6. 27.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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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_처용고사

노래에 맞추어 달걀 흰자위로 처용을 그리고, 밀가루를 뿌리고 천을 흔들었다. 밀가루가 드라이아이스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관객들의 쏟아지는 박수 속에서 천을 걸어 올리자 하얀 처용이 나타났다. 또다시 박수가 터졌고, 외국인들이 어린 시절 나처럼 “매직”이라 소리쳤다.

‘담빛 풍류’에서 연희단팔산대와 악사들이 처용을 부르는 노래를 하며 바다를 상징하는 파란 천 위에 달걀 흰자위와 참깨로 처용을 그려 올리고 있다. 담양군문화재단 제공

경부선 회덕 분기점에서 호남선으로 빠지면 엑스포아파트가 보인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청춘이 고여있는 곳이다. 남자들에게도 화양연화의 시절이 있다면, 내게는 그 나이 그때였다. 1993년 93일간, 밤이면 밤마다 축포가 울렸다. 축제란 말을 지금처럼 유행하게 한 기폭제였다. 벌곡나들목을 지나면 우측 산 너머가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와 신암리 일대, 옛 황산벌이다. 지금이야 웃음 짓지만, 내게 엑스포는 비장한 황산벌이었다.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가 대전엑스포 부제 중 하나였다. 지금도 부제를 기억하는 것은 그 한 줄로 생각의 구렁텅이에 빠졌기 때문이다. 내가 맡은 것은 전통놀이마당의 상설공연이었다. 첫 문을 여는 개막제, 사실 돼지머리 올려놓고 고사 지내면 될 일이었다. 이 나라에 오신 손님께 이 나라 전통을 보여주면 되었다. 그런데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란 말에 걸려들어 버렸다.

개막제에 처용을 모시는 고사를 계획했다. “서라벌 달빛 아래 밤늦도록 노닐던” 처용은 설화일망정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 땅 최초의 춤꾼이다. 신라 헌강왕 때부터 전승된 처용무(處容舞)는 고려 5백 년과 조선왕조 5백 년을 이어왔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립국악원에 계승되어 이 땅 최고령의 춤으로 장엄히 존재한다. 이 처용을 모셔 놀이마당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다. 대본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

처용무는 한때 풍두무(豊頭舞)였다는 주(註)도 달았다. 처용무에 지극했던 연산군 때문이다. 연산은 기생이 처용무를 잘 추면 상을 주고, 못 추면 귀양을 보냈다. 물론 자신이 먼저 처용무를 추었다. 환관 김처선은 처용무에 흠뻑 빠진 연산을 말렸다. 분노가 극에 달한 연산은 그를 처참히 죽이고 모든 문서에서 그의 이름 '처(處)' 자를 사용치 못하게 했다. 아뿔싸! 그토록 아끼는 처용무도 '처(處)'자가 들어가 있었다. 하여 가면에 꽃과 과일이 가득해 풍두무라 개명하고 구중궁궐을 세트로 밤늦도록 추었다. 이로 인해 서라벌 달밤의 처용설화는 아픈 역사까지 간직한 실화가 되었다고 썼다.

대본에 먹줄을 튕기니 더욱 번듯해졌다. 그러나 엑스포는 첨단과학의 축제였다. 테크노피아관과 우주탐험관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때 두려움이 몰려왔다. 게다가 한빛탑에서는 밤마다 레이저쇼를 계획했다. 아무리 처용을 크게 만든다고 해도 거들떠나 볼 것인가. 그렇다고 누추하게 무릎 꿇을 수는 없었다. 과학이 골격화된 세상에서 전통의 힘을 선보여야 했다. 비장한 각오를 다짐하기 위해 물어물어 황산벌을 찾았다. 스스로 떠안은 책임감의 무게에 맨땅에서도 발이 푹푹 빠졌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내가 왜 전통에 빠져들었을까? 곰곰이 생각하니, 신문에서 본 해외토픽이 문제였다. 중앙아프리카에서 팔다리가 갈라졌을 때의 치료법. 그냥 병정개미를 붙잡아 상처를 꽉 깨물게 하고 곧바로 몸통을 따버린다. 그렇게 몇 바늘 꿰매듯, 몇 마리를 상처에 물리면 개미의 독에 지혈이 되고 상처가 아문다. 이삼일 후 손으로 비벼서 개미를 털어내면 완치다. 외신은 이런 신통한 전통도 이제 사라져가니 안타깝다 했다.

그 개미 때문일까? 시퍼런 젊음이 개미지옥에 빠져버렸다. 황산벌을 다녀온 한 달 뒤쯤, 담양을 지나는 길에 할머니 산소를 찾았다. 할머니는 서울의 셋방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객사(客死)라 했다. 그래서 상여가 동네에 들어갈 수 없었다. 운구차에서 상여로 관을 옮길 때 종친 어른이 명정(銘旌)을 썼다. 망자의 관직이나 성씨 등을 써 상여 앞에 들고 가는 붉은 깃발이다. 달걀을 깨 흰자위만 그릇에 모으고, 붓에 그 흰자위를 묻혀 붉은 천 위에 일필휘지로 써 내렸다. 그 위에 밀가루를 뿌리고 툭 털어내면 붉은 바탕에 ‘유인경주김씨지관(孺人慶州金氏之棺)’ 흰 글자가 선명히 드러났다. 어릴 때부터 초상집에서 골백번도 더 보아 온 마술이었다. “아!” 기억이 그쯤 될 때, 단숨에 하산해 버스터미널로 뛰었다.

대전엑스포 놀이마당 개막식. 붉은 명정 천을 바다를 상징하는 푸른 천으로 바꾸었다. 처용을 그리기 위해 동쪽 둥지의 달걀과 서쪽 밭에서 자란 밀을 준비한다고 했다. 대전엑스포인데 왜 동해의 처용을 모시느냐? 혹시 몰라 대전이 중앙이라 동과 서의 제물을 쓴다고 ‘연출의 변’에 써두었다. 누가 읽었을까마는, 그래도 준수코자 동쪽 슈퍼에서 달걀을 서쪽 슈퍼에서 밀가루를 샀다. 노래에 맞추어 달걀 흰자위로 처용을 그리고, 밀가루를 뿌리고 천을 흔들었다. 밀가루가 드라이아이스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관객들의 쏟아지는 박수 속에서 천을 걸어 올리자 하얀 처용이 나타났다. 또다시 박수가 터졌고, 외국인들이 어린 시절 나처럼 “매직”이라 소리쳤다.

담양나들목에서 나와 할머니의 산소를 들렀다 읍내로 왔다. 지난 6월14일, 담양군문화재단 10주년 기념 ‘담빛 풍류’를 준비 중이었다. 그간 재단은 주조장을 전시장으로 만든 해동예술촌과 농업창고를 개조한 전시장 남송창고로 세칭 ‘대박’을 내었다. 이제 공연예술과 생활문화의 균형발전이 과제였다. 공연예술과 생활문화의 공통분모는 춤과 노래, 당연지사 가무의 신인 처용이 필요했다. 이사장인 이병노 담양군수는 막힘없는 사람이라 고사에 편견이 없었다.

혹자가 영남의 처용을 호남에서 모시느냐면, 처용무의 반주 음악이 수제천(壽齊天)임을 상기하면 되었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백제가요 정읍사의 기악곡이 수제천이다. 행상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백제 여인의 노래가 신라 처용의 춤과 만났으니 영호남 합작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한민국의 국가무형유산, 유네스코의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었으니, 이제 처용을 두고 영호남을 따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공연 이틀 전,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입관할 때 울음이 터졌는데, 사촌들보다 더 울 수는 없었다. 내게 새총을 만들어주던 그분의 손을 마지막 잡아보았다. 장례지도사가 관을 닫고 컴퓨터에서 뽑아낸 명정을 관 위에 놓았다. 이제 명정을 쓰는 방법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어쩌면 나의 처용 고사에만 그 전통기술이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문득 중앙아프리카에 병정개미로 상처를 봉하는 전통의술이 아직 남아있을까 궁금했다.

발인 날,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공연장을 향했다. 출연자 모두 리허설이 필요 없는 명인들이지만, 문제는 처용이었다. 우선 공연장에서는 밀가루를 뿌릴 수 없다. 가루들이 부유하다 조명기 렌즈에 붙어 타버린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지금은 납작한 참깨를 사용한다. 참깨가 잘 붙으려면 흰자위가 천에 잘 묻어야 한다. 또 너무 묻어 참깨와 흰자위가 덩어리지면 무게 때문에 떨어진다. 그래서 처용을 잘 그리려면 신의 가호도 조금 필요하다.

‘담빛풍류’의 막이 열리자 연희단팔산대가 파란 천을 들고 나타난다. 파도치듯 천을 놀리면서 처용을 부른다. 벌써 10년 넘게 불러온지라 몇 장단 만에 추임새가 터진다. 참깨를 뿌려 올리자 선명한 처용이 나타났다. 처용 앞에 장구 둘을 세우면 고사상이 되고 헌관인 군수가 나왔다. 연출로서 간 떨어지는 순간인데, 다행히 독실한 불자의 숙련된 배례는 공연의 격을 높일만했다.

고사상을 해체해 장구를 동여맨 연희단팔산대가 농악을 시작했다. 여성들인데 날벼락 치는 소리가 났고, 질풍노도로 솟구쳐 공중을 돌았다. 박수가 터져 나오자, 무대 위에 걸린 처용이 씩 웃는다. 영화감독의 페르소나는 스타지만, 전통감독인 나의 페르소나는 신이다. 감독과 스타 간에 ‘묻지마 출연’이 있고, 나와 처용 사이는 ‘묻지마 출연료’가 있다. 대전엑스포 이후 30년 호흡을 맞춰온 우정 때문이다. 여세를 몰아 다음엔 춤의 본향 영남에서 처용을 불러내야겠다.

진옥섭 |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져들었다. 서울놀이마당 연출로 서울굿을 발굴하면서 ‘무(巫)’에 심취했고, 초야를 돌며 기생, 무당, 광대, 한량 등 숨은 명인을 찾았다.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리며 마침내 ‘무(無)’를 깨닫게 되었다. 이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고, 무대와 마당을 오가며 판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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