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 괴질 고쳤던 오대산 상원사…부처님 사리 모신 ‘불교성지’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2024. 6. 2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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㉝ 강원도 평창 상원사
.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상원사의 입구 역할을 하는 누각, 청풍루

“영성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다.” 오대산 깊은 곳에 자리한 천년고찰 월정사를 이끄는 주지 정념스님은 현대사회가 탈(脫)종교화 되어가고 있어 ‘종교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그럼에도 지구촌 곳곳에는 여전히 종교 때문에 전쟁과 갈등이 벌어지고, 살인적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성지순례에 나선 수천명 순례자들이 사망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한반도의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 자장율사(590~658)는 이 땅에도 사방에 부처와 보살이 머물며 중생을 구제한다고 믿는 불국토 사상을 전파했다. 불법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그 자리가 그대로 불국토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한반도의 전통적인 ‘산악 숭배’ 신앙이 불교와 결합돼 신라시대 강원도 오대산은 불국토 사상의 근간이 되는 곳이었다.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친견한 중국 오대산(우타이산)의 이름을 그대로 적용했고 동서남북과 중앙에 각기 방위에 따른 보살의 인연처를 두는 이른바 ‘오대 신앙’도 뿌리내렸다.

태백산맥 줄기인 강원도 오대산은 주봉인 비로봉(1563m)을 중심으로 동대산(1434m), 호령봉(1042m), 상왕봉(1493m), 두로봉(1422m) 등 5개 봉우리로 구성돼 있다. 각 봉우리 사이마다 평평한 대지가 있는데 동대(만월대), 서대(장령대), 남대(기린대), 북대(상삼대), 중대(지공대)라고 불린다. 오대산은 5곳의 대지에 둘러싸인 산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경남 양산 통도사에 있는 자장율사의 진영

자장율사는 오대산 깊은 곳에 643년 월정사를 창건하고 중대에 중국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안치했다. 그리고 동대(관음암)·서대(염불암/수정암)·남대(지장암)·북대(미륵암)·중대(사자암)엔 각 보살들이 상주하면서 설법하던 곳으로 선포했다.

필자는 작년 11월 초 중대에 있는 사자암 적멸보궁을 다녀왔는데 최근 상원사를 방문했다. 오대산 다섯 곳의 암자와 상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월정사의 말사이다. 하루를 들여서 월정사와 상원사, 오대(五臺) 암자를 모두 둘러볼 수 있는데 아직까지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 중생인지라 월정사는 몇 차례 방문했음에도 각 암자들을 한꺼번에 가보진 못했다.

세조임금과 상원사의 인연
작년 가을 방문한 오대산 사자암에서 바라본 산세

상원사의 창건 유래다. 705년(성덕왕 4년)에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가 이곳에 진여원(眞如院)이란 이름의 절을 세웠다. 두 왕자는 여기서 수행하며 오만(五萬)의 불보살을 친견하고 산의 각 봉우리에 오대 암자를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보천·효명왕자가 오대산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수행하다가 5개 봉우리에 나타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지장보살, 석가여래 등이 나타나 참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랬던 진여원은 이후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사라졌다. 그러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서야 나옹(懶翁)화상의 제자 영령암(英靈庵)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진여원을 발견했다. 그는 이 터에 절을 중창(1377년)했고 지금의 상원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령암은 선객(禪客) 33명을 모아 10년을 좌선(坐禪)하던 중, 1381년에 중창 5주년 기념법회를 열었는데 승당의 불상이 빛을 내고 향 냄새를 풍겼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태종은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할 것을 명하여 불상 봉안과 스님들의 거처를 만들고 직접 사자암을 찾아 성대한 법요식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이후 세조는 상원사에서 괴질을 치료하기도 했다. 절의 고양이 덕분에 자객의 습격을 피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상원사는 세조의 원찰(願刹, 죽은자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인정받았다. 덕분에 엄혹한 숭유억불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절들이 탄압받았으나 이 절만큼은 번성했다.

[세조의 괴질 치료 전설]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즉위 직후 괴질에 시달렸다. 몸에 좋다는 물과 기도처를 찾던 중 오대산 상원사에서 기도를 올리며 인근 오대천에서 목욕을 했다.
임금은 마침 부근을 지나던 사미승(어린 남자 승려)을 불러 등을 닦게 했다.
그러면서 “왕의 옥체를 씻었다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자 동자승은 “왕께서는 문수보살을 친견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대답하는 게 아닌가.
세조가 놀라서 돌아보니 동자승은 사라지고, 괴질은 말끔하게 나았다.
화공에게 그 동자승 얼굴을 그리게 하여 절에 모셨는데 그것이 상원사 문수동자상이다.

더불어 세조는 상원사 고양이와 인연도 전설로 내려온다. 세조가 절 법당으로 들어가려는데 고양이들이 왕의 바지 자락을 물며 길을 막았다. 이상하게 여겨 법당 안을 조사하니 세조를 노리는 자객이 숨어 있었더란 이야기다.

조선 왕조의 보호를 받았던 절이지만 1946년 발생한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들이 전소됐다. 이듬해 월정사 주지였던 이종욱(李鍾郁)이 상원사를 중창했다. 6·25전쟁 때는 이 절에서 수행 정진하던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 덕분에 피해를 입지 않고 난리통을 이겨냈다. 월정사 등 오대산의 다른 사찰들이 잿더미로 변한 것과 대조적이다.

‘문수보살’의 성지
상원사의 초입. 양 편으로 사자상이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상’을 봉안한 사찰이 상원사와 사자암이다. 그래서 상원사는 문수보살이 주불인 문수전을 중심 전각으로 삼아서 ‘문수성지’라고도 불린다. 사찰 입구에서 울창하게 우거진 300여m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번뇌가 사라진다는 계단 길을 만난다. 여기를 사자상이 지키고 있다. 계단을 오르다보면 사천왕문 대신 ‘천고의 지혜, 깨어있는 마음’이라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이 적힌 푯말을 단 청풍루를 지나게 되고, 몇 계단 더 오르면 절 앞마당 정가운데 있는 5층 사리탑과 중심 전각인 문수전에 도착한다.

‘ㄱ’자형으로 지어진 문수전 안에는 국보로 지정된 문수동자상과 보물인 문수보살상 그리고 서대에 있던 걸 옮겨온 목각의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이 함께 봉안돼 있다. 문수동자상은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주처(住處)임을 증명하고 문수보살상은 세조가 직접 친견하였다는 오대산 문수동자의 진상(眞像)을 조각한 목조좌상이다.

문수전. 문수동자상과 문수보살상 등을 모신 건물이다.
상원사 동종의 무늬를 찍어낸 탁본. 종 표면에 세밀히 조각된 비천상은 신라 불교미술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연합]

문수전을 중심으로 우측에 16나한을 모신 영산전(靈山殿)과 청량선원(淸凉禪院)이 있고 좌측엔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과 동정각이 있다. 동정각엔 국보로 지정된 동종이 보전돼 있다. 종에 새겨진 비천상이 아름다운 동종은 8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국내 최고(最古)로 알려졌다. 경주의 봉덕사종(에밀레종)과 함께 2개 밖에 남아있지 않은 신라 범종이라고 한다. ‘하늘의 소리가 울려 향기롭다’는 뜻의 천음회향(天音回香)이란 글귀가 동종 앞에 있다.

동종각 앞에는 세조가 왔을 때 어룡기를 걸어두었던 당간지주가 있다. 용과 호랑이를 조각하고 꼭대기에는 황금색 봉황이 앉아 있다. 좌측 적멸보궁 방향에 있는 후원의 만화루 앞 ‘지혜의 샘물’이 있는 일원각에선 방문객들이 목을 축인다. 그곳에서 20여m 더 가면 우측에 적멸보궁 가는 산길로 접어드는데 30여분쯤 걷다보면 중대 사자암 턱밑까지 갈 수 있다.

일원각의 지혜의 샘물

상원사 오르는 계단 입구에는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라고 적힌 안내판과 ‘오대서약’이라는 안내문이 있어 곱씹어 본다.

하나. 다른 생명을 아끼면서 함께 살아갑시다.

둘. 남의 것 욕심 내지 말고 자기 살림을 아낍시다.

셋. 맑은 몸과 정신을 지니고 바른 행동을 합시다.

넷. 남을 존중하고 말씀을 아낍시다.

다섯. 밝은 생활을 하면서 좋지 못한 것을 하지 맙시다.

오대산의 자랑, 사자암 적멸보궁
신라시대 제작된 동종이 걸려 있는 동정각(가운데 건물)

오대산 동대 관음암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장엄하다. 서대의 염불암에는 남한강의 시원(始原)이라는 네모난 돌우물로 된 우통수(于筒水) 샘물이 있어 조선 초까지는 수정암(水精庵)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이 장관이나, 욕심을 버려야만 지낼 수 있다는 비탈진 산골 외진 곳의 아주 작은 암자다. 남대 지장암은 오대산에서 유일한 비구니 암자이며 우리나라 최초로 비구니 선방을 개설한 곳이다. 북대 미륵암은 오대산에서 가장 높은 곳(1200m)에 위치한 암자로 설악산 봉정암 높이(1244m)와 얼추 비슷해 겨울철 거센 삭풍이 몰아칠 때면 고립된 외로운 섬이 된다. 나옹선사가 고려의 왕사가 되기 전까지 이곳 북대에서 누더기를 걸치고 숨어 살았다고 전해진다.

상원사에서 찻길이 열려있는 끝까지 가다보면 적멸보궁 올라가는 계단을 맞이한다. (상원사에서 침엽수림 숲길을 따라 30여분 걷다보면 사자암 바로 밑 중간 계단 길을 만날 수도 있다.) 여기서 600여 계단을 오르면 적멸보궁을 관리하는 행랑채처럼 보이는 사자암이 나타나는데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적멸보궁

산길 경사면 위에 5층 구조로 지어진 사자암은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고 일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한다고 하는 비로전이 맨 윗층에 자리하고 있다. 그 우측으론 산신각이 있고 좌측엔 적멸보궁 올라가는 초입으로 종무소가 들어서 있다. 1100m 고지인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가을 오대산의 풍광과 산세의 지형은 일품이다. 비로전 뒤편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다시 600여m 600계단을 20여분정도 가쁘게 숨을 내쉬며 오르면 해발 1190m에 적멸보궁이 나타난다. 비로봉(1563m)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목인데 정상까지 1.5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서 있다.

오대산 정상 비로봉 인근 다른 산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명당에 자리한 적멸보궁은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중국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와 정골(머리뼈)을 둔 건물이다.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정선 태백산 정암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와 함께 한국의 5대 적멸보궁으로 꼽힌다. ‘부처님 정골 사리’를 모셨다고 하니 더 특별하다.

적멸보궁 뒤에 세워진 사리탑비

간절한 염불 소리가 산에 울려 퍼지고 좁은 적멸보궁 안에는 기도하는 불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적멸보궁 법당 뒤편에는 여기에 사리를 봉안했음을 표현하고 있는 듯 5층탑 문양이 새겨져 있는 비석이 있다. 적멸보궁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법당 주위를 계속 돌면서 기도하는 불자들도 여럿이다.

한암·탄허·만화…한국불교 중흥의 세 주역
상원사와 관련된 세 명의 화상을 기리는 탑비

상원사가 올려다 보이는 오른쪽 양지 바른 곳에 한암, 탄허, 만화 세 화상(수행을 많이 한 승려)의 탑비가 있다.

한암 대종사(1876~1951)는 만공스님과 함께 ‘제2의 원효’로 불리었던 경허선사의 제자로 한국불교를 일으킨 계승자였다. 도반이자 사형인 만공스님은 수덕사를 중심으로 선풍을 일으켜 민족불교를 수호하고 오늘의 불교계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인맥인 덕숭문중을 이뤘다. 반면 한암 대종사는 보조국사 지눌의 맥을 이어 선교쌍수(禪敎雙修)를 중히 여기며 봉은사 조실로 있다가 50세에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가면서 “천고(千古, 오랜 세월)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 짧은 시간)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하고는 1951년 입적 할 때까지 27년간 산문 밖을 나오지 않았다.

그는 5가지 승려의 기본덕목(참선·염불·간경·의식·수호가람)인 승가오칙(僧伽五則)을 만들었고 생전에 ‘오대산 도인’으로 불렸다. 조선총독부의 인가로 창립된 조선불교조계종 초대 종정이었으며 네 번 더 종정에 추대됐다. 6·25 전란 중에 목숨을 걸고 상원사를 소각의 위험으로부터 구해낸 뒤 전란 중에 좌탈입망(坐脫立亡, 앉은 채로 입적)했다.

상원사 경내 모습

중대 사자암 앞에 뿌리내린 수령 100여년 된 단풍나무는 한암스님이 짚었던 지팡이가 잎이 돋고 가지를 뻗은 것이라고 한다. 한암의 수제자로서 현대불교 중흥에 평생을 바친 탄허스님(1913~1983)은 불·유·도 삼교에 통달한 대석학으로 특히 화엄학에 정통했다. 화엄경 등 수많은 경전을 번역했고 수많은 후진을 양성해 한국 불교 중흥을 이끌었다. 만화스님은 탄허스님의 제자로 월정사 주지가 되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월정사를 재건하고 교단 정화와 한암·탄허스님의 수행기풍을 계승, 진작시킨 오대산의 버팀목이었다.

오대산, 이곳이 한국 불교의 성지라는 자부심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상원사를 지켜낸 한암 대종사가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서 현대 한국 불교가 건강하게 뿌리 내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자긍심도 여전히 단단하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

n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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