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무적자⑥] 쉽게 내디딜 수 없는 사회로의 첫 발, 성본창설

김지욱 기자 2024. 6. 27.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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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 받으러 오셨는데 자기는 주민등록증이 없다고 등본을 받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이분을 어떻게 하면 제도권 안으로 넣을 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됐고 그래서 내부적으로 소장님이랑 직원들이랑 또 회의를 거쳐서 이분들한테 한번 도움을 줘보자, 그래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쪽방촌상담소 윤종근 사회복지사

3년 전, 남대문 쪽방촌 상담소의 윤종근 사회복지사는 주민인 김 모 씨에게 주민등록번호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윤 씨의 복지사 경력 가운데서도 처음 있었던 일. 윤 씨와 남대문 쪽방촌이 선뜻 나섰지만, 김 씨가 주민등록증을 갖기까지는 무려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까? 김 씨와 같은 무적자가 국가 전산망에 들어가기 위해선 주민등록과 가족관계등록을 해야 합니다. 이런 등록에 앞서 필요한 절차가 있는데, 그게 바로 성과 본을 만드는 '성본창설'입니다. 공식적인 성 씨와 본적이 없이 살아온 이들에게 이름을 만들어주는 겁니다.

문제는 이 성본창설 과정부터 큰 어려움이 따른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 신분 회복을 포기하거나 잠적하는 무적자들도 심심찮게 생깁니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무적자를 돕는 '조력자'들과 함께 따져보겠습니다.
 

복잡한 법적 절차…"존재하지 않는 걸 증명해야"

이승애 변호사

성과 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법원의 허가를 구해야 합니다. 법원은 행정기관을 통해 '주민등록신고 확인서'와 같은 서류들을 받아올 것을 요구하는데,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무적자들이 전문가의 도움 없이 이러한 서류들을 떼기란 쉽지 않습니다. 부산 지역에서 무적자들의 성본창설을 돕고 있는 이승애 변호사는 성본창설 절차에 대한 지원이 없는 행정기관의 시스템도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다들 자기 분야가 아니래요. 여기 전화해보라고 하고 저기 전화해보라고 하고. 한 두세 달 동안 전화만 했거든요.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요."

이런 이유들로 무적자들은 대개 법률 전문가 또는 사회 복지사들의 도움을 받아 절차를 진행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법원이 요구하는 서류들을 받아낼 수 있을지 확실치 않다는 겁니다. 특히 그동안 기록 없이 살아왔음을 입증하는 '가족관계등록부 부존재 증명서'의 경우, 존재하지 않은 걸 증명해야 하는 다소 모순적인 입증 책임을 무적자에게 부여하기도 합니다.
 
"전국 동사무소에서 (신청인의) 주민등록번호가 없고 성과 본이 없다는 확인을 받아 법원에 내야 해요. (행정기관에) 그걸 진행하신 분들도 별로 없고, 그런 게 확실히 있는 서류가 아니기 때문에, 그 점이 어려워요."
 

기록 없는 이의 삶을 보증하는 일

입증이 어려운 서류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법원은 무적자들의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가 이들의 출생과 과거 행적에 보증을 서는 '인우보증서'를 요청합니다. 자신의 성도 알 수 없는 무적자들에게는 존재를 대신 설명해줄 사람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복지시설에 입소한 무적자의 경우 등본 상 세대주인 시설 원장 혹은 복지사들이 보호자의 형태로 보증을 서기도 하지만, 거리에서 생활하는 노숙인의 경우 이마저도 불가능합니다.

서울시립 은평의 마을의 배순상 사회복지사

제3자 보증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따릅니다. 사회복지사들은 사례자들의 출생과 과거 행적을 알 수 없으니, 보증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공공 영역에는 이들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서울시립 은평의 마을의 배순상 사회복지사도 시설 내 무적자들의 보증을 서면서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혔습니다. 가족들의 실종 신고로 사망 처리까지 된 무적자의 기록을 찾을 때 느낀 막막함은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이 분이 진짜 그 사람인지 증명해야 될 서류들이 필요한데 예전에 70년대 80년대에 사망 신고가 된 사망 말소자여서 지문이 등록이 안 돼 있는 거예요. 졸업 증명서라도 떼 오라고 하는데 (학교에선) '당신이 뭔데 졸업증명서를 떼 줘'라고…."
 

성본창설이 어려운 진짜 이유

"남한테 내 사정 얘기를 하기 싫어서. 이제 와 고아라는 사실을 밝히기 싫어서 칠십 평생을 그저 지내왔어요."

지난해 성과 본을 만든 69세 강 모 씨가 전한 말입니다. 성본창설이 어려운 가장 본질적인 이유가 여기 담겨있습니다. SBS가 추적한 신분 회복자들의 평균 나이는 약 46세. 반평생을 사회에서 소외된 채 살아온 무적자들이 제도권으로 들어가 또 다른 사회적 낙인을 감수하는 데 주저함이 따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사회 안전망 속에서 복지 혜택을 받는 것에 대한 필요성 자체를 못 느끼는 것도 성본창설이 더딘 이유입니다. 특히 근로 능력이 있어 당장의 생계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무적자들은 오히려 사회에 편입됨으로써 불필요한 의무를 져야 하기에 이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등포쪽방상담소 김형옥 소장

하지만 영등포쪽방상담소의 김형옥 소장은 이들의 노후까지 고려했을 때, 성본창설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지금은 젊으니까 앞으로 15년, 20년은 일할 수 있겠죠. 그러다 질병이 생기고 근력이 저하되면 수급자를 신청해야 하는데. 사회에 편입돼야 교육을 받고 자기 개발을 통해 취업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가 되잖아요.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한양 김 씨를 아시나요?

SBS는 이런 어려움을 딛고 성본을 얻은 356명의 삶을 분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약 30%에 달하는 이들이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본으로 쓰고 있는 겁니다. 1970년대 이후 성본을 만든 이들이 당시에도 사라진 지명을 왜 자신의 본관으로 사용했을까요?

법원은 신청인의 의사 등을 고려해 본을 정해줍니다. 자신의 뿌리를 알 수 없는 무적자들은 보통 현 거주지를 본적으로 신청합니다. 하지만 법원은 원래 있는 본을 사용하게 할 경우, 씨족제도를 근간으로 한 우리 사회에 혼란이 생길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친족 관계에 혼란이 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서울이란 본을 신청한 무적자들에게 서울의 옛 이름 한양을 본관으로 정해주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이게 관습으로 굳어졌습니다. 처인 ○ 씨, 남포 ○ 씨 등 기존에 본관으로 쓰이지 않는 지명들이 무적자들의 뿌리가 된 이유도 같습니다.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 백주원 변호사

하지만 이런 판단은 새로운 부작용도 낳았습니다. 이들의 생소한 본적이 일종의 낙인효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최근에는 신청인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본창설 과정을 돕는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 백주원 변호사는 "본인의 성과 본을 결정을 하는 것이 본인의 기본권 중의 하나로 생각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기존 법원의 판단에 문제가 있단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절차만 바꿔도"…가장 필요한 건 '관심'

성본창설 요건이 까다로울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있습니다. 불법으로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들이 무적자로 위장해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성본창설 과정과 요건을 마냥 간소화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법원에서 신청자들의 사례를 정성적으로 살펴 자격 요건에 융통성을 두는 일은 필요합니다.

백주원 변호사는 현행 절차의 순서만 바꾸는 것 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현재는 인우보증서와 같은 서류를 제출한 뒤에야 사례자에 대한 심문 기일이 잡히는데, 재판부가 신청인을 먼저 심문한 뒤 자격 요건 완화 여부를 결정해 서류를 요구한다면 성본을 창설하는 무적자들이 지금보다 훨씬 늘어날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무엇보다 성본 창설을 꺼리는 무적자들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무적자들의 성본창설을 도와온 사람들은 이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관심'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합니다.
 
"조금만 더 신경 쓰면 알 수는 있어요. 신분증 가지고 있냐, 그다음에 의료급여는 받고 있냐 조심스럽게 물어보면 되거든요. 동네 의원에선 급여 환자 같은 경우는 국가에서 의료비용을 지급해 주거든요. 물어보면 돼요. 조금의 신경만."

김지욱 기자 wook@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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