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이건희∙현승훈∙서경배∙신성수…‘부산 기반’ 부자들의 특급 컬렉션
‘컹! 컹! 컹!’
사납게 우짖는 소리가 귓전을 때릴 듯하다. 날카로운 이빨 드러낸 채 눈 부라린 삽살개, 복슬복슬한 털로 온몸과 말린 꼬리를 덮은 몸매가 정겹지만 표정은 매서운 280여년 전 개 그림을 앞세운 전시회 하나가 지금 나라 안의 그림 애호가와 전문가들을 부산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18세기 활동한 도화서 화원 김두량의 1743년 작 소품 그림 ‘삽살개’를 전시 들머리의 얼굴로 삼은 부산 남구 대연동 부산박물관의 특별기획전 ‘수집가 傳(전) : 수집의 즐거움 공감의 기쁨’이 그 자리다. 해방과 1950~1953년 한국전쟁 시기 부산을 기반으로 성장해 부산의 경제·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네개 기업재벌인 삼성, 아모레퍼시픽, 화승, 고려산업의 전·현직 총수들이 부자(父子)의 연을 이으면서 대대로 모은 최고의 고미술 명작들을 추려낸 알짜기획전이다.
일단 출품한 작가들과 작품의 면면이 놀랍다. 김두량의 작품에 이어 정선, 심사정, 김홍도, 신윤복, 김정희, 장승업, 안중식 등의 대표작과 숨은 걸작들이 줄줄이 나왔고, 민화의 한줄기인 궁중장식화의 명작과 고려청자매병과 청화백자각병, 달항아리 같은 도자기의 최고 명품들도 가세했다. 4월26일 시작한 전시는 불과 두달이 지났지만, 연일 뜨거운 관심 속에 두달여 만에 관객 6만명을 넘어서는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미술판에서는 올해 상반기 가장 주목받은 전시로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의 한·중·일 불교미술명품 기획전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을 꼽는 데 이론이 별로 없다. 하지만 수집가와 애호가들 사이에선 재벌기업 부자(富者)들의 부자(父子)컬렉션의 회화, 도자기들을 대중들이 보기 좋게 갈무리해 펼쳐놓은 이번 부산 특별전도 그에 못지않은 양대 전시로 꼽을 만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시의 서두는 4개 기업의 부자 컬렉터들을 사진과 함께 패널설명으로 소개한 뒤 이들의 컬렉션을 대표하는 소품 그림들을 나란히 배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부산에서 한국전쟁기 삼성물산을 창업하고, 국내 최초의 대규모 제조업 공장의 원조로 꼽히는 제일제당 공장을 지은 이병철 삼성 선대회장과 가업을 이어받아 전자 반도체 분야의 글로벌 기업군을 만든 이건희 전 회장의 컬렉션을 대표하는 첫 소품은 바로 단원 김홍도가 그린 ‘수하오수도’. 복숭아나무 앉은 새를 보며 평상에서 잠을 청하는 도인의 모습을 담았다.
김두량의 삽살개는 나이키 제조와 르까프 브랜드로 유명한 화승그룹의 현승훈 회장의 소장 컬렉션으로 전시회의 얼굴과도 같은 그림이다. 삽살개 한마리가 누군가를 보고 막 짖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몸의 고불고불한 털 한올 한올을 정교하게 묘사하며 사실감을 살린 전문화가의 필력이 돋보인다.
고려산업회장이자 국립중앙박물관회 회장을 지낸 신성수 눌원문화재단 이사장의 자리엔 17세기 초 선조의 부마였던 신익성의 강직한 초상이, 화장품으로 유명한 아모레퍼시픽그룹의 고 서성환, 서경배 회장의 대표 컬렉션으로는 18세기 거장 정선의 고즈넉한 한강변 풍경 ‘용정반조도’가 나왔다. 그 안쪽으로도 이 네 기업 가문 컬렉터들이 소장한 비장의 그림들이 이어진다. 단원 김홍도가 18세기 후반 그린 것으로 추정하는 ‘답상출시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의 주목작. 그동안 좀처럼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이란 점에서 애호가들의 각별한 눈길을 받는 단원의 수작이다. 만물이 꽁꽁 얼어붙은 어느 겨울날 새벽에 굳은 표정으로 짐을 지운 소와 말을 움직이며 먼 길을 떠나는 젊은 장사치들의 긴장감 어린 출행 광경이 스산한 나무숲과 언덕길 사이로 묘사되어 있는 작품이다.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은 이 그림을 보고 나서 ‘그림 속 사람들은 즐거워하지 않지만,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무한하게 좋은 정취가 있음을 깨닫는다”는 글을 그림 위에 써 놓았다. 신성수 이사장의 소장품인 ‘예안 김씨 가전계회도’는 매우 희귀한 16세기 관료들의 기념사진첩 성격의 기록 그림으로 불타기 전 조선 초기 경복궁 광화문 일대의 모습이 담긴 ‘기성입직사주도’가 포함돼 더욱 각별한 감상의 재미를 선사한다.
김홍도의 유명한 대작인 ‘삼공불환도’와 이암의 강아지 그림인 ‘화조구자도’도 리움 수장고를 나와 부산으로 나들이왔다는 점에서 귀한 감상 거리가 된다. 도자기 분야에서는 이건희 회장이 평소 아꼈던 백자 청화 대나무무늬 각병(국보·이건희 기증컬렉션)과 김환기의 옛 소장품으로 널리 알려진 현승훈 회장 소장의 달항아리들이 단연 눈길을 끄는 애장품들로 꼽힌다.
이번 전시는 명작 그림들을 바로 유리판 한장만 두고 코앞에서 볼 수 있도록 한 밀착식 진열구성과 다채로운 동선과 곡선형 진열장으로 관람 편의를 극대화한 도자기 진열실의 구성이 상찬을 받고 있다. 정은우 관장은 “지난해 이건희기증컬렉션 순회전이 큰 관심 속에 전국을 순회하는 것을 보고 이건희 컬렉션을 포함해 부산 지역에서 성장한 기업인들의 알려지지 않은 명작 컬렉션들과 그 이야기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전시를 기획했다”면서 “남은 전시기간 동안 더 많은 분들이 친숙하면서도 낯선 고려 조선 미술사의 비경을 체험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다음달 7일까지.
부산/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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